


셀레스티아는 하교를 할 때면 집으로 바로 갈 수 있는 골목길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항상 큰 길로 빙 돌아가곤 했다. 오랫동안 사람이 살지 않았는지 유리창이 깨져 있는 반지하 빌라가 있는 골목이 어딘가 으스스했기 때문이다. 원래 범죄도 이런 데에서 많이 일어나잖아. 최근 이 년 반동안 낮이 짧았기 때문에 그의 걱정도 아예 허황된 것은 아니라고 본다.
윈터 스노우
...8월의 시작 목요일입니다. 오늘은 조금 풀린 날씨로 낮 동안에는 눈 대신 비가 내릴 것으로 예상되어 우산을 챙기셔야겠습니다. 저녁에는 기온이 영하로 떨어져 다시 눈이 내릴 것으로 보입니다. 기상정보였습니다.
틀어 놓은 텔레비전에서는 기상 캐스터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클라모르가 큰 목소리로 셀레스티아에게 외쳤다. 셀레스티아, 학교 갈 때 우산 까먹지 마.
"으응..."
막 일어난 듯한 셀레스티아가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클라모르는 학교 일로 바삐 짐을 챙기고 나갔다. 셀레스티아는 시계를 봤다. 9시 38분. 헐 지각.
기후 변화니 탄소 배출이니 뭐니 하는 것들로 인해 지구는 빙하기에 돌입했다. 재난 영화 같은 빙하기까진 아니고 순한 맛 빙하기 정도. 눈이 사시사철 가릴 것 없이 종일 내렸다. 처음엔 사람들도 좋아했다. 너도 나도 나서서 남의 집 담벼락에 눈오리니 하는 것들을 잔뜩 진열해 놓고 뜰채로 거대 눈뭉치를 만들었다. 그러나 그것은 한 한달 갈까 말까 했다. 사람들은 금세 매일같이 집 앞을 가로막는 눈을 치워야 하는 것에 대한 불만을 토로하기 시작했다. 저 어딘가의 사계절 내내 눈이 내리는 극지방의 나라에서만 승리의 미소를 짓고 있을 뿐이었다. 그렇게 이 년 반째 겨울이었다.
애초에 생활기록부에 대해 별 신경을 쓰지 않는 셀레스티아였기에, 그는 여유로운 발걸음으로 집을 나섰다. 인생 뭐 있어. 화끈하게 무단 지각 질러버려. 그러다 골목길 쪽으로 흘끔 시선을 던졌다. 그리고 다시 학교로 가려는 찰나에 무언가 이상해서 다시 고개를 휙 돌려 보았다. 이상하네. 원래 창문이 저렇게 깔끔했던가? 셀레스티아는 왠지 이상한 기분과 함께 큰길로 얼른 발걸음을 돌렸다.
셀레스티아는 하굣길에 골목길에 잠입했다.
비가 내려서 그런지 하늘은 더욱 어두컴컴했다. 실로 오랜만에 와보는 골목길이었다. 눈이 내린 이후에는 거의 한 번도 와보지 않은 것 같았다. 습관이 이렇게 무섭다... 라는 생각을 하며 발걸음을 옮겼다. 골목길엔 모르던 세탁방이 하나 들어와 있었다. 그 옆의 상가는 눈 내리기 전부터 임대 문의란 종이 쪼가리 하나 붙여놓고 텅 비어 있더니 이번에 싹 새로 갈아엎었나 보다. 분위기 좋은 카페 들어오기 딱 좋았다. 그는 시선을 오른쪽으로 고정한 채 계속 걸었다. 그의 시야에 상자가 몇 개 담긴 파란색 용달 트럭이 들어왔다.
그리고 그 앞엔 반지하 빌라가 있었다.
"비가 내릴 줄은 몰랐네요. 수고하세요."
옆엔 깔끔한 스타일의 앳된 소년이 트럭 기사에게 꾸벅 인사를 했다. 셀레스티아는 그것을 보자마자 전봇대 뒤로 몸을 숨겼다. 아차 하는 생각과 함께 다시 전봇대 뒤에서 나왔다. 내가 왜 이러지. 뭐 켕기는 거라도 있는 사람처럼. 그러나 그에 대한 호기심은 지울 수 없었다. 와도 이런 어두침침한 곳에 이사를 오고. 뭐 하는 애일까?
궁금증은 얼마 안 가 풀렸다.
예상치 못한 눈 폭풍으로 1학기를 죄다 날려먹었던 그의 학교는, 무리를 해서라도 2학기엔 전원 등교를 목표로 하고 있었다. 개학도 늦춰진 바람에 그는 9월이 다 돼서야 학교엘 나올 수 있었다. 미뤄진 동아리 모집도 오늘 한댄다. 물론 학생회 면접도 같이 진행된다. 그는 3학년이라 심사에 거의 참여하진 못했지만, 딱히 공부를 안 하는 그는 학생회실을 깔짝대며 창문 너머로 면접 과정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디귿자로 배열된 책상에 2학년 면접관들이 앉아 있었다. 1학년들은 시계 방향으로 돌아가며 질문에 답했다. 그 와중에 뭔가 본 듯한 머리가 있는 듯도 하다. 짙은 파란색 머리? 어디서 봤지?
"뭐 하냐?"
어께 너머로 들린 말소리에 셀레스티아가 화들짝 놀라 뒤돌아봤다. 같은 동아리의 3학년인 A였다.
"아! 놀래라."
"뭐해. 도둑놈같이."
"애들 면접하는 거 보고 있었거든."
"이번에 괜찮은 애들 좀 지원하긴 했냐?"
우리 면접 때 이상한 애들만 있어가지고 진짜 간당간당했잖아. 셀레스티아가 그 말을 듣곤 장난스레 웃었다. A도 추억을 회상하는지 목을 쭉 뻗고 창문 너머를 살폈다. 기린마냥 목도 길었다. 한참을 보던 그는, 지나가는 어투로 말했다.
"야 근데, 이번에 입학하는 애들 중에서......"
"어?"
"아 아니다. 넌 모를듯."
"아 말하다 마는 게 어딨냐."
"별 거 아니야."
아! 얘기하라고. 그와 실랑이를 하던 도중에 B가 뭐 재밌는 거라도 있는지 자습하다 말고 나와서 그들에게 다가갔다. 그는 셀레스티아나 A와 같이 같은 동아리는 아니었지만, 셀레스티아와 1학년 때 같은 반, A와는 3학년 때 같은 반... 해서 어찌저찌 셋이서 아는 사이다.
"야. 얘가 말하다 말고 사람 열받게 해."
"뭔데. 뭔 얘긴데."
"아니... 아 씨."
그러다 A와 B가 귓속말을 주고받는다. B는 알았단 듯이 고개를 느리게 끄덕이다...
"말 해."
라며 명쾌한 해답을 내놓는다.
"아 근데 얘는...... 모를 수도 있긴 하겠다. 얘 그런 거 은근히 관심 없잖아."
하고 덧붙이는 것도 잊지 않고.
A는 아직도 고민 중이다. 셀레스티아 눈에는 그냥 별 것도 아닌 걸로 괜히 유세 떠는 것처럼 보였다. 보다 못한 B가 한 마디 한다. 말 하든 말든 별 상관 없지 않나? 어차피 누군진 애들 다 모르잖아. 뭘 그런 걸로 고민하냐. 그 말에 A는 비장한 결심을 하고 말한다.
"이번에 입학하는 애들 중에...... 게이 있대."
잠시 정적이 흘렀다.
"아... 그래?"
원랜 이런거 신경 안 쓰는 척하는게 예의다. 괜히 오픈마인드인 척 오지랖 떨면 그게 더 민폐다. 셀레스티아는 장난스럽게 A에게 쿠사리를 줬다. 그래서 뭐 어쩌라고. 예민하네? 화났네?
"아니! 아... 나도 그런 거 신경 안 쓰거든?"
"신경 안 쓰는 새끼가 5분 넘게 고민하면서 말하네 마네 하냐?"
"꺼져. 교실이나 들어가. 개 춥다 진짜."
슬 눈치를 보던 B가 "그래, 들어가자." 라는 말과 함께 스타트를 끊었다. A는 기다렸다는 듯이 B를 따라 쫄래쫄래 반 안으로 들어갔다. 셀레스티아는 반으로 들어가 버린 둘을 뒤로 하고 멀찍이 떨어진 자신의 반을 향해 걸었다. 마음속에 새로이 자리잡은 궁금증과 함께.
옷을 챙겨입은 클라모르는 나가기 전에 마지막 빨랫감들을 세탁기 안에 넣었다. 뚜껑을 닫고 버튼을 누르는 순간, 세탁기에서 불길한 소리가 들렸다.
"뭐야. 이게 왜 이런대."
밑에서 물이 샜다. 하긴 이때쯤이면 보내줄 때도 된 세탁기였다. 그는 시계를 봤다. 갈 시간이 거의 다 되어 왔다. 이 이상 지체하면 분명 늦을 것 같았다. 그는 셀레스티아에게 전화를 걸었다. 엎드려 자다가 막 깬 셀레스티아는 복도로 나와 최대한 안 잔 척을 하며 전화를 받았다.
[어 형. 왜?]
"너 집 오면 세탁기 안에 옷 꺼내서 세탁방 가서 좀 돌려야겠다. 맛이 갔어 세탁기가."
[그래, 그럼.]
"내가 지금 학교를 가야 해서... 끊을게."
[응. 갔다와.]
전화가 끊겼다. 헐 근데 그럼 빨래 젖은 건가. 셀레스티아의 머릿속엔 물에 잔뜩 젖어 무거워진 솜을 낑낑대며 메고 가는 당나귀의 이야기를 그린 동화가 스쳐지나갔다.
"아, 무거워. 개무겁다."
셀레스티아는 바구니 안에 빨랫감을 한가득 넣고 행여나 빙판길에 미끄러질까 조심스레 걸어갔다. 아파트를 나와 샛길에 난 조그만 출입구로 걸어나왔을 때, 그는 맞은편 반지하 빌라에서 한 소년이 나오는 것을 봤다. 그 트럭 옆에 있던 남자애. 그도 마찬가지로 옷가지가 든 바구니를 안고 있었다. 설마. 주변에 세탁방이라곤 여기 하나 뿐이었다.
윙윙 돌아가는 세탁기 소음 사이로 어색한 시간이 흘렀다. 셀레스티아는 폰에만 고개를 박고 있었다. 그는 무슨 생각을 하는지 정자세로 멍을 때리다 갑자기 옆에 가져온 책을 꺼내 읽었다. 초점 밖으로 보이는 희미한 인영의 변화에 셀레스티아는 폰을 보던 것을 멈추고 화면 너머로 그를 흘끗 쳐다봤다. 니콜로 마키아벨리의 군주론. 와 뭐야. 무슨 대통령 하게? 사실 무슨 대기업 회장의 아들이었던 거지. 그에 대한 여러 망상을 펼치다 또 이내 흥미를 잃고 다시 눈앞의 화면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그러다 세탁이 끝났다는 세탁기의 알림음이 들렸다. 기다렸던 순간이다. 어색한 이 상황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그는 힘차게 걸어나가 당당하게 세탁기 문을 열었다. 그러나 그를 맞은 것은 넥타이에 파란 무늬가 있는,
그의 학교 1학년 교복이었다.
뒤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거... 제 건데."
"아, 아. 죄송합니다."
"아뇨, 괜찮아요."
"그... 여기 근처 고등학교 일 학년이세요?"
"아, 맞아요. 어떻게 아셨어요?"
"제가 삼 학년이라. 우리 학교 교복이라서..."
"선배네요. 안녕하세요."
그는 깔끔하게 고개를 까딱 숙여 인사를 하곤 옷가지를 정리하고 유유히 빨랫방을 빠져나왔다. 빠르지도 느리지도 않은 속도였다. 그가 오른쪽으로 꺾어 빨래방의 통유리창에서 사라지게 되어서야 그는 긴장이 풀리는 듯 했다. 미쳤나봐. 당황해서 그냥 아무 말이나 했다. 쟤 눈엔 내가 어떻게 보였을까. 아마 일 학년이라고 가오 좀 잡아보려는 미친 삼 학년처럼 보였을지도 모른다. 아오 멍청아. 셀레스티아는 제 머리를 퍽 때렸다. 눈치 없는 세탁기 알림음만 울렸다. 시끄러운 알림음 사이에서도 사그라지지 않는 생각 하나가 있었다. 아까 걔... 꽤 미남이었다고.
생각의 폭주는 그 다음날에도 멈추지 않았다.
아니 진짜로. 그 색 보고 뭐라 하냐. 애쉬 블루? 푸른빛 머리칼에 깊은 눈. 오똑한 콧대랑, 아니, 그거 다 제끼고 그 사연 있는 눈빛이. 건조한 분위기였지만 눈망울만큼은 결코 건조하지 않았다. 누가 그러더라. 눈이 촉촉한 사람들은 인생이 기구하다고. 혼자 이사 온 걸까? 17살짜리가? 그건 좀 에반데. 가족들과 같이 왔겠지?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진짜 누구 하나 붙잡고 속 시원하게 말이라도 하고 싶다. 그러나......
<예상 답안>
A: 아...... 그렇구나.
B: 우리 학교 온다는 게이가 너였구나.
특히 B는 더 음성지원이 된다. 그 특유의 갸륵한 표정을 하고 사람 놀리듯이 말할 그를 생각하면 엉덩이라도 걷어차 주고 싶은 심정이었다. 짜증나면서도 심란했다. 그는 고개를 묻고 엎드렸다.
"...또 보고 싶다."
미적으로 완벽한 것에 끌리는 건 사람의 본능이니까. 그렇게 합리화했다.
그러다 어느샌가 잠이 들었다. 몇 시간이 지났을까, 그는 사부작대는 말소리에 서서히 깼다.
"아, 얘 또 잔다."
"엉덩이를 걷어차 버려. 다신 의자에 못 앉게."
"그래. 평생 스탠딩 책상만 쓰게 해주자 이새키."
언제나 평화로운 A와 B였다.
"......"
"깼냐?"
셀레스티아가 까치집이 된 머리를 정리하며 부스스 일어났다.
"동아리 출석 찍고 오래."
"땡큐... 으, 눈부셔."
"그만 좀 자라."
눈을 반쯤 뜬 채로 이리저리 비틀대며 몇 번 부딪칠 뻔 하다가 겨우 학생회실 앞에 도착했다. 학생회실은 언제나 좋다. 중앙 제어를 받지 않는 곳이라 히터가 마음대로기 때문이다. 그는 교실 문을 열었다. 그리고 바로 앞의 책상에 앉아 있는 소년을 보고, 다시 제가 잠이 덜 깼나, 생각했다.
미남.
걔. 그 세탁방 미남. 사실 이름은 모른다.
미남도 자신을 기억했는지 눈동자 움직이는 꼴이 딱 아는 눈치다. 어! 그 사람...... 하는 듯이 눈을 팍 치켜세우다, 이내 선배라는 것을 깨닫고 가볍게 목례를 했다. 셀레스티아도 손을 흔들며 어색하게 인사를 받았다.
"쌤, 저 동아리 출석 찍으러 왔는데......"
"어, 근데 너만 혼자 생기부에 쓸 거 안 냈더라. 딴 애들은 다 냈는데."
아... 그... 그랬나요? 제가 잠이 많아가지고요. 하하하. 머쓱한 듯 뒷통수를 긁었다. 선생님은 온 김에 쓰고 가라며 그에게 볼펜과 공책 찢은 종이를 내밀었다.
"근데 너 혹시 토론 대회 나갈 생각 있냐?"
"그거 삼 학년들은 거의 다 안 하지 않아요?"
"니가 삼 학년이냐."
"헤헷..."
틀린 말은 아니다. 삼 학년 치고는 그다지 열심히 한다 할 것도 없으니... 선생님이 내미는 볼펜과 종이를 받고 뒤를 돌았다. 앉을 수 있는 모든 자리는 채워져 있었다. 딱 한 자리 빼고.
아, 이런 소설같은 전개 좀 싫은데.
미남은 제 눈치를 보다 옆의 책상 위에 올려놓은 자신의 가방을 슥 치워 제 책상에 매달아 놓았다. 미남아, 너까지 왜 그래. 이럼 이제 못 빼잖아... 그는 어기적 걸어가 미남의 옆에 앉았다. 사실 내심 섬유유연제 냄새나 우드 향 이런 걸 아예 기대 안 한 건 아니었다. 근데 앉아보니 그냥 뭐... 세탁방 세제 냄새였다.
학생회실은 따뜻했다. 따뜻하고, 패딩은 포근하고. 딱 자기 좋은 환경이었다. 어느새 그는 옆에 미남이 있던 말던 꾸벅꾸벅 졸기 시작했다. 글씨가 이리저리 날아간다. 고개를 까딱이며 그 블랙아웃 되듯이 조는 느낌은 언제나 익숙하지 않다. 그러다 좀 오래 잔 것 같았다. 눈을 떴을 땐 제 손에 들려 있었던 볼펜을 집어 가는 미남이 앞에 보였다.
"뭐야...?"
미남은 제가 더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그, 졸리신 거 같아서... 이거 그냥 옆에 놔드리려고."
"아, 아."
그는 볼펜을 다시 그에게 건넸다. 왠지 모르게 화끈해지는 느낌이었다. 잠은 다 달아나고 없었다. 그는 자신도 뭐라고 쓰는 지 모른 채 마구 휘갈기고 얼른 자리를 떴다. 학생회니까 리더십. 뭐 그런 거 대충 과장 조금 보태 썼다. 셀레스티아는 선생님에게 종이를 내고 도망치듯이 학생회실을 나왔다. 미남... 미친 놈. 잘생겼고... 그리고 다정하다.
"이 새끼 왜 이렇게 멍해?"
"공부를 안하는 자신에 대한 자괴감에 드디어 미쳐버린 거지..."
"다 닥쳐......"
한동안 멍하니 있던 셀레스티아에게 A와 B가 와서 한 마디씩 했다. 말은 이렇게 해도 다 착한 녀석들이에요. 하하. 하하하. 하며 짱구 엄마처럼 저놈들의 두개골을 주먹으로 비비는 상상을 했다.
"얘들아... 황금 비율이라는 건 뭘까?"
"자다 일어나서 또 헛소리 한다."
"어쩌면 미대 입시를 해보려는 포부 아닐까?"
"니네 다 꺼져라 그냥..."
개너무하다. A가 툴툴대며 B를 끌고 반을 나갔다. B는 뭔가 생각이 난 듯이 되돌아와 다시 셀레스티아의 자리로 갔다.
"니 내일 중간 치는 거 알지."
"아... 그랬었나?"
"내일 또 쳐 자다가 반 못 찾아가지 말고."
"알겠어. 땡큐."
B는 시발데레야. 다시 고개를 묻고 잠을 청하려 했으나 한번 깬 잠은 쉽사리 다시 오지 않았다. 아 학생회실. 학생회실 진짜 따뜻한데... 문득 미남의 얼굴이 머릿속에 스쳐지나갔다. 또 자다가 들켜서 망신당하는 건 아니겠지. 설마 이 시간에 학생회실에 있겠어? 동아리 시간도 아닌데. 도착한 학생회실에는 미남이 없었다. 그러나... 동아리 담당 선생님이 있었다.
"너 자려고 왔지."
"...아닙니다만!"
"공부 언제 할 거야 너."
"언젠간... 요."
요리조리 변명하며 셀레스티아는 뭐라도 해야 되겠다는 사명감을 느꼈다. 그 순간 선생님이 넌지시 말했던 토론 대회가 생각났다. 맞다 그게 있었지.
"쌤 저 토론 대회 할까요?"
"너 그거 진짜 나가게?"
"네... 뭐."
저보고 나가라고 하신 말인 거... 아니었어요? 아니? 그냥 말해본건데? 아 진짜요? 그리고 그거 팀전인데... 삼 학년들 다 공부하는데 너랑 같이 해줄 사람 있겠냐. 아... 그런가... 셀레스티아는 머리만 벅벅 긁으며 슬그머니 선생님의 맞은편에 의자를 끌고 가 앉았다. 학생증 사진이 첨부된 학생회 신입생 명단이 보였다. 셀레스티아는 그것을 가만히 읽어내려갔다.
"다른 학년이랑은 하면 안 돼요?"
"안될 건 없지."
"그럼 할까요?"
"근데 너 잠만 자는데 친한 애는 있냐?"
"없어요."
"교실이나 가 봐라."
"넵."
학생회실을 나오며 명단에서 본 그 이름을 가만히 곱씹어 내려갔다. 리버레이터. 이름이 리버레이터구나. 어쩐지 잠이 모두 달아난 기분이었다. 발걸음이 가벼웠다.
원래 정시파이터는 중간고사 때 자는 게 국룰이다.
셀레스티아는 OMR카드를 받자마자 과목 번호 하나 확인하고 일렬로 찍고 엎드려 잤다. 사실 중간고사 때 자는 게 제일 빡세다. 선택과목이니 뭐니 해서 또 우르르 반을 바꾸며 몰려다니는 게 그렇게 귀찮을 수가 없다. 그러나 오늘은 운수 좋게 세 교시 모두 셀레스티아의 반에서 시험을 봤다. 아싸 세시간 숙면 개꿀. 마지막 교시의 OMR을 받자마자 정해진 수순대로 일렬로 찍고 깊은 수면에 빠졌다.
그리고 눈을 떴을 땐 다섯시 반이었다.
망했다...
밖은 이미 해가 저물고 있었다. 강풍이 덜 닫힌 창문의 틈새로 들어와 기괴한 소리를 내었다. 셀레스티아는 잠이 덜 깬 채로 힘없이 일어나 교실 창문을 더듬고 다녔다. 찾았다. 덜 닫힌 이중창. 그것을 닫으려 밖의 창문을 잠시 열었을 때 엄청난 한기가 전해져 왔다. 잠이 확 깼다. 그는 아침에 들었던 일기 예보가 떠올랐다.
강풍과 함께 엄청난 양의 눈이 내릴 것으로 예상되며...
눈폭풍이다.
이 상태로는 집에 못 간다. 그 전에 일단 교실이 너무 추웠다. 자다 깨서 그런 것일지는 몰라도 몸이 덜덜 떨려 왔다. 불현듯 학생회실 생각이 났다. 셀레스티아는 턱을 패딩 목부분에 박아 넣은 채로 종종걸음으로 학생회실로 향했다. 그곳에는,
"어..."
리버레이터가 있었다.
그날 그 자리 그대로. 문 바로 앞 자리. 그의 손에는 종이와 가위가 들려 있었다.
"집 안 갔어?"
"이거 끝내려다가요."
그는 빳빳한 도화지를 살짝 들어 보였다. 인쇄된 사진들과 텍스트들이 조잡하게 붙어 있었다. 축제 포스터였다. 셀레스티아는 자연스럽게 그의 옆에 슬쩍 앉았다. 학생회실은 따뜻했다. 긴장이 풀린 그는 리버레이터에게 말을 걸기 시작했다.
"이거 한다고 집에 안 간 거야?"
"네, 뭐..."
"와... 열정적이네."
"그, 그런 건 아니고... 이거 마무리하고 하교하려고 했는데, 생각보다 할 게 너무 많아서요. 눈이 오기도 하고..."
"응..."
"선배는요?"
"나? 난 자다가."
리버레이터의 입에 옅은 미소가 띄워진다. 작게 숨쉬듯 웃는 소리를 내더니 다시 자르고 붙이는 일에 집중한다. 셀레스티아는 그가 해놓은 것들을 뒤적거려 보았다. 자른 윤곽선이 삐뚤빼뚤했다. 제대로 풀칠이 되지 않아 덜렁이는 것도 있었다. 딱 그 나이대의 손재주 없는 남자애 작품이라 좀 웃겼다. 게다가 좀 열심히 해보려고 한 느낌 한 스푼까지. 그는 리버레이터가 쓰고 다시 둔 풀을 집어 덜렁이는 종이의 테두리에 발라 마무리를 했다.
"가위 하나 더 있어?"
"네? 하시게요?"
"응. 도와줄게."
"아, 괜찮은데..."
"준다 할때 받아 임마."
넵. 그는 장난스럽게 대답하며 일어섰다. 교탁 서랍을 몇 번 뒤지더니 가위를 하나 더 꺼내 왔다. 클립으로 정리해 둔 종이들 사이에서 몇 개를 고르곤 그에게 내밀었다. 이거만 잘라 주시면 될 거 같아요. 엉, 그래...
사각사각 하는 소리가 교실 안을 가득 채웠다. 따뜻하고 건조한 히터의 바람이 불어온다. 밖에는 흰 눈이 내렸다. 종이를 내려놓다가 이따금씩 서로 팔이 부딪쳤다. 셀레스티아는 전혀 신경쓰지 않는다는 듯 팔을 부딪치던 말던 종이 자르는 것에 열중했다. 손이 떨려 잘린 종이의 윤곽선이 울퉁불퉁했다는 것도 모른 채.
어느새 눈이 그쳐가고 있었다.
"야, 야. 밖에 봐봐."
"네?"
"눈 좀 그쳤는데?"
"그렇네요. 갈래요?"
"응. 가자. 지금 아니면 집 못 가."
리버레이터는 종이로 너저분했던 책상을 대충 정리하고 책상 옆에 걸린 가방을 들어 맸다. 셀레스티아는 교실에 가방을 두고 오는 바람에 그냥 멀뚱히 보기만 했다. 그 모습을 보던 리버레이터가 그에게 물었다.
"선배, 가방 안 싸요?"
"나? 나 교실에 놓고 왔어."
"그럼 선배네 교실 갔다 갈까요?"
"됐어. 어느 세월에 또 갔다 가. 그냥 가자. 어차피 나 집에서 공부 안해."
사실 학교에서도 안 하지만... 뒷말은 속으로 삼켰다. 휴대폰 불빛에 의지해 계단을 내려가던 중 배터리 잔량 표시 알람이 떴다. 그 순간 가방에 있던 충전기 생각이 났다.
"아, 씨... 나 가방에 충전기 있는데."
그것을 들은 리버레이터는 잠시 생각하다 말했다.
"선배, 잠깐만요."
그러곤 계단을 빠른 속도로 뛰어 올라갔다. 휴대폰 불빛에 의지해 조심스럽게 계단을 내려가던 것이 민망해질 정도로. 엄청 어두울 텐데. 혹여나 자빠지진 않을까 걱정했지만 계단을 올라가며 쿵쿵 울리는 소리가 규칙적인 것으로 보아 그럴 일은 없는 것 같았다. 그는 정말 빠르게 돌아왔다. 한 손에는 셀레스티아의 책가방을 든 채로.
"어? 야..."
"얼른 가요. 눈 오기 전에."
셀레스티아는 가방을 건네 받을 새도 없이 그에게 등 떠밀려 계단을 내려갔다. 가방 진짜 필요 없는데. 충전기는 형 거 빌리면 됐었고... 그런 그에게 가방 심부름을 시킨 것도 모자라 들게까지 하고 있으니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리버레이터는 정문을 지나서야 그에게 가방을 들려주었다. 셀레스티아가 고맙다는 인사를 하기 전에, 리버레이터가 더 빨랐다.
"근데 가방 진짜 가볍네요, 선배."
"야."
가방 가져다준 사람한테 때리는 시늉은 조금 너무한 것 같아 그의 볼을 가볍게 꼬집었다. 리버레이터는 실없이 웃었다. 이런 표정도 지을 줄 아는 사람인가. 그 무표정하기만 했던 애가. 그가 웃자 셀레스티아의 얼굴에도 미소가 번졌다. 셀레스티아는 작게 말했다.
"...고마워."
...근데 너 내 반은 어떻게 알고 있었어?
가는 길목엔 가로등이 간간히 켜져 있었다. 길에는 아직 아무도 건드리지 않은 눈이 소복히 쌓여 있었다. 백지같은 눈에 두 사람이 지나가며 나란한 발자국이 새겨진다. 이 년 반동안 정말 지겹게 봤던 눈인데, 이렇게 보니 감회가 새로웠다. 마치 어린 날의 화이트 크리스마스처럼 묘하게 설레어 오는 것 같기도 했다. 손발은 차가운데 얼굴만 뜨거웠다. 그는 괜히 휴대폰을 꺼내 만지작거렸다. 눈 이제 안 오나? 하며 기상 정보를 검색했다.
"추워요. 배터리 빨리 닳아......"
순간이었다. 그가 자신의 손을 살짝 잡아 내렸다. 셀레스티아는 당황스러움에 거의 폰을 놓칠 뻔 했다. 찰나의 그 터치가 불에 덴 자국처럼 남는 듯했다. 아, 응, 그렇지. 하며 아무렇지 않은 척 보던 것도 채 못 끄고 대충 패딩 주머니에 폰을 넣었다. 찰나의 순간에 손등에 느껴진 그의 손의 감촉. 버석했다. 그런데 뜨거웠다. 손에 열이 많은가봐. 난 손발이 차갑고 얼굴에 열이 많은데. 어색함에 대뇌는 아무 말이나 뱉으려 한다. 사실 손발이 거의 한계까지 차가워지긴 했다. 눈에 발이 푹푹 꺼지는 길을 걷느라 발이 거의 동상에 걸릴 것 같은 느낌이었다.
"...발 시려워."
리버레이터가 셀레스티아의 발을 흘끗 내려다봤다. 반쯤 젖어버린 간지용 천 재질의 운동화.
"저희 집 잠깐 들를래요?"
"어, 뭐?"
"거의 다 왔어요."
리버레이터가 앞을 가리켰다. 시선이 손가락을 따라간다. 셀레스티아는 그제서야 자각했다. 자신이 그렇게 기피하던 골목길을 자각하지도 못하고 걸어왔다는 것을.
"...응... 그러면 좋지..."
제멋대로 움직여버린 제 입도.
"조금 구려요."
"가릴 게 어딨어. 지금 추워서 얼어 뒤지게 생겼는데."
리버레이터가 웃기다는 듯이 푸스스 웃었다. 그는 젖은 제 머리를 털며 수건을 찾으러 들어갔다. 그를 따라 안으로 들어가고 싶었지만 당당히 운동화를 벗을 용기가 나지 않았다. 나 지금 완전 추한 거 같은데... 신발에 묻은 눈만 녹아 신발장을 흥건하게 만들고 있었다.
"들어오세요."
"...발이 젖어서..."
그러나 리버레이터는 개의치 않아 보였다.
"괜찮아요."
아... 그래? 셀레스티아는 쭈뼛대며 신발을 벗었다. 그것은 잔뜩 젖은 채로 불쾌한 감촉을 남기며 벗겨졌다. 그는 까치발을 든 채로 소심하게 걸어들어갔다.
"편하게 앉으세요."
셀레스티아는 소파에 앉았다. 우중충한 반지하의 이미지와는 다르게 가구들은 눅눅한 느낌 하나 없이 깔끔했다. 전부 새것처럼. 소파의 맞은편에는 협탁 위에 작은 티비 하나가 있었다. 대충 있을 건 다 있었다.
"조용히 해야 되는거 아냐?"
"네?"
"부모님 깨실 수도 있으니까..."
"아, 저 혼자 살아요."
"혼자?"
그렇다기엔 너무나 넓은 집이었다. 아니, 애초에 고등학생 1학년짜리가 자취를? 자취를 한다면 왜 여기에? 기껏 자취할 거면 이런 변두리 말고 시내의 좋은 학교엘 가지. 그의 머릿속엔 한 소설의 남자 주인공이 몸이 안 좋아져 혼자 시골로 내려왔다가 분교의 여자 주인공과 눈이 맞는 전형적 소설의 설정이 그려졌다. 그리고 끝도 없는 상상력은 여자 주인공의 얼굴에 자신을 대입... 썅. 셀레스티아의 눈살이 찌푸려진다.
"원랜 같이 살았는데."
"어..."
"일이 있어서 저만 내려왔어요."
"아... 그렇구나."
리버레이터가 그의 발을 지그시 쳐다봤다. 발은 추위에 새빨개져 있었다. 그는 그 발을 망설임 없이 잡았다. 발바닥에 뜨거운 살갗의 감촉이 닿았다. 셀레스티아는 소스라치게 놀랐다.
"뭐, 뭐해."
"안 추우세요?"
리버레이터는 상식 밖의 행동을 하면서도 당당했다. 이거 진짜 미친놈인가. 그 와중에 진심인지 그의 발을 이리저리 돌려 잡으며 더 차가운 부위에 그의 뜨거운 손바닥을 가져다 댔다. 이런 놈이랑 같이 있으면 자신의 정상적 사고회로도 같이 물들어 버릴 것만 같았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나는...
"나 간지럼 타..."
"아."
그가 손을 탁 풀었다. 발은 맥아리 없이 소파 아래로 떨어진다. 이런 상황이 연출된 것 자체가 민망했다. 이제 슬슬 집에 가야 될 것 같았다. 아니, 사실은 좀 더 있고 싶었다. 그런데 조금만 더 여기에 있으면 빨개진 얼굴을 들킬 것만 같았다. 왜 빨개졌는지는 나도 모른다. 손발이 차서 그런가 보지. 그는 젖은 양말을 대충 챙기고 어기적 일어났다. 와 나 지금 완전 추하네.
"슬리퍼 빌려드릴까요?"
"괜찮......"
셀레스티아의 머릿속에 양말도 신지 않은 채로 젖은 운동화를 신고 가는 자신의 모습이 그려졌다.
"어. 빌려줘."
"네."
리버레이터는 신발장을 열어 슬리퍼 하나를 꺼내주었다. 신발장 안으로 정갈하게 정리되어 있는 신발들이 흘끗 보였다. 은근히 섬세하네. 슬리퍼는 길이는 맞았는데 윗부분이 약간 컸다. 셀레스티아는 찍찍이를 떼서 발에 맞게 다시 붙였다.
"나중에 돌려줄게."
"네. 안녕히 가세요."
현관문이 닫히고서야 자각했다. 나 그러면 이거 돌려주려고 얘 한번 더 보는 거네. 그는 지금 그의 집을 나온 것에 대해 안심했다. 이렇게 빨개진 얼굴은 도저히 숨기지 못할 것만 같아서.
그리곤 한동안 그를 만나지 못했다. 셀레스티아는 동아리 담당 선생님을 졸라 리버레이터의 반을 알아냈지만, 학교에 있는 시간의 반을 잠으로 보낸 그인지라 애초에 갔을 때가 별로 없기도 했고, 갈 때마다 그는 반에 없었다. 슬슬 짜증이 나기 시작한다. 어? 얘는, 선배가 찾는데도 코빼기도 안 보이고... 어? 물론 진짜 짜증은 아니고 가짜 짜증이긴 했다. 중간고사도 다 끝났다. 다시 축제 준비로 학생회실에 모였을 때도 그는 없었다. 셀레스티아는 그제서야 일말의 불안감을 느꼈다. 선생님에게 물어보니 결석이라고 했다. 너 왜 그렇게 걔한테 집착하냐? 장난이었을 선생님의 말이었지만 셀레스티아는 왠지 모르게 찔렸다. 그, 그냥 걔한테 빌린 거 있어서요.
"후배 삥뜯고 그러지 마라."
"그런 거 아니에요..."
"전화번호라도 알려줘?"
"네? 네."
그러고 보니 번호도 모르고 있었다. 전화번호를 저장하고 첫 문자 메세지를 보내는 데에만 5분을 머리 싸매고 있었다. '너 왜 안와' 이건... 너무 추궁하는 것 같고. '학교 왜 안 왔어' 이것도 화내는 것 같다. 그냥 장난스럽게, 신경 안 쓰는 것처럼.
[학교 왜 안옴]
딱 이게 제일 나은 것 같다. 문자를 보내자마자 휴대폰을 뒤집어 놓았다. 1분만에 폰을 다시 뒤집어 보았다. 아무것도 오지 않았다.
폰을 잘 안 보는 편인가 보다. 답장은 셀레스티아가 하교를 할 때가 되어서야 왔다.
[저 본가 올라왔어요]
그 한마디에 네가 멀게 느껴지는 이유는 왜일까.
[언제 오는데]
[?]
[오늘 출발해요]
[슬리퍼 어떡할까]
[아]
[현관에 두면 제가 가져갈게요]
[선배 편한 대로 하세요]
당연히 얼굴 보고 줄 줄 알았는데. 왠지 모를 서운함이 느껴졌다. 티내기엔 찌질하고 그냥 넘어가기엔 후회할 것 같다. 결국 셀레스티아는 또 핑계를 댔다.
[ㄴㄴ]
[누가 훔쳐감]
[학교 오면 연락해]
휴대폰을 보던 리버레이터가 웃었다. 조수석에 탄 그의 어머니가 거울로 뒤를 보다 몸을 돌려 그에게 말했다.
"차 안에서 휴대폰 보지 마라."
"네."
그는 주머니에 폰을 넣는 척 하다가 슬쩍 메세지 창을 다시 켜 보았다. 선배의 그 특유의 말투. 정말로 누가 훔쳐갈까 걱정하는 것인지, 아니면 얼굴을 보고 주고 싶은 것인지 그로썬 알 턱이 없었다. 그래서 리버레이터는 제 멋대로 생각하기로 했다. 그도 자신과 같은 마음이길 바라면서.
"얼굴 보기 어렵다. 어?"
셀레스티아는 들고 있던 쇼핑백을 내밀었다. 리버레이터는 그 자리에서 슬리퍼를 꺼내 보았다. 그리고 신고 있던 신발을 벗고 슬리퍼에 발을 구겨 넣어 보았다. 셀레스티아가 줄여 놓은 탓에 당연히 발은 쉽사리 들어가지 않았다. 셀레스티아의 얼굴이 빨개졌다.
"아니, 이거, 내가 다시 원래대로 해놓는 걸 깜빡해서."
셀레스티아는 몸을 숙여 찍찍이를 뗐다. 머리 위로 큭큭대는 웃음소리가 들렸다. 웃냐? 웃어? 씨이 너 지금 나 꼽 주지.
"그거 같아요. 신발 끈 묶어주는 거."
"뭐래..."
"조금 설렜어요."
"...꺼져."
셀레스티아는 쇼핑백을 대강 접어 리버레이터의 품에 던지듯 안겨 주며 자리를 떴다. 뒤에서 자기를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선배, 학생회 토론 있잖아요.
"응. 그거 왜?"
"같이 해요."
"그, 그럴까?"
"끝나고 연락할게요."
어, 응... 멍하게 있는 사이 리버레이터는 몸을 돌려 떠났다. 또 얼레벌레 승낙해버렸다. 나 이렇게 쉬운 남자 아닌데.
"토론 주제가 이렇게 세 개 있거든."
"네."
"이게 제일 만만해 보이니까 이걸로 하고... 피피티랑 대본 정도만 만들면 될 것 같은데."
"그렇게 해요, 그럼."
대화가 끝난 후 리버레이터는 시선을 노트북에 박고 묵묵히 제 할 일만 했다. 그를 가끔씩은 알다가도 모르겠다. 친해진 것 같아도 금세 다시 멀어진 기분이 들곤 했다. 셀레스티아는 허전함에 괜히 고개를 리버레이터 쪽으로 기댔다. 어깨에 기대 오는 무게를 느낀 그는 그 행동이 무슨 뜻인지 잠시 생각하는 듯 하다가 노트북을 셀레스티아 쪽으로 돌려 화면을 보여줬다. 화면에는 'GMO 식품, 안전한가?' 라는 토론 주제에 걸맞은 세련된 감성의 피피티 디자인이 띄워져 있었다.
"개잘하네."
"그래요?"
"배웠냐?"
"조금요."
조금요는 또 뭐야... 리버레이터는 또 자기만 아는 웃음을 짓고 제 일에 열중했다. 문득 셀레스티아는 의외로 그에 대해 아는 것이 별로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도 그럴 것이 번호도 어제 막 알았고.
"여기 오기 전에는 뭐 했어?"
바삐 타자를 치던 그의 손이 멈춘다.
"오기 전...... 요?"
"아니... 뭐, 대답 안 하고 싶으면 안 해도 되고..."
"전... 에. 뭐 하고 지냈더라."
이제 그의 손은 키보드 위에 가만히 올려져 있었다. 시선은 멍하니 화면에 고정되었다. 그러다 목을 천천히 돌리며 스트레칭을 했다. 뭐 했더라. 그냥. 그냥 있었죠. 그냥 그랬는데.
"...도망치고 싶어서 왔어요."
"여기로?"
"네."
가만히 듣던 셀레스티아의 표정이 굳었다.
<초미남 필살기 제1장 어두운 과거 드러내기>. 같은 기분이었다... 왠지 더 물어보면 안 될 것 같았다. 괜히 물어본 제 자신이 원망스러웠다. 그냥 가만히나 있을 것이지. 아무렇지 않은 척 자신의 일에 집중하려고 할 때, 리버레이터가 똑같은 질문을 했다.
"선배는요."
셀레스티아가 고개를 들었다.
"전에는 어땠어요?"
전?
무엇이 기준일까.
삼 학년이 되기 전? 고등학생이 되기 전? 그러나 단 한 가지 촉이 오는 건 '자신을 만나기 전' 이라는 기준이었다. 오만하기 그지없는 발언이다. 내 인생에 자신이 큰 터닝 포인트라도 되는 줄 알고 하는 말이기 때문이었다. 근데도 은근슬쩍 장단을 맞추어 주고 싶었다. 얄팍한 셀레스티아의 독심술에 의해, 리버레이터는 내가 자신을 신경쓰고 있었으면 하는 바램이지만, 티 내고 싶지 않아 이런 식으로 두리뭉실하게 말을 꺼냈다- 라고 도끼를 찍어본다.
"글쎄."
리버레이터가 한껏 긴장한 표정으로 그를 올려다본다.
"맨날 잤지."
"아."
분위기가 순식간에 풀렸다. 리버레이터가 웃었다. 그리고 지나가듯이 말했다. 공부 해야죠. 그 말이 어쩐지 세게 박힌다. 자격지심인가.
"하긴 해야지."
"......"
"근데... 되고 싶은 것도 없는데."
"아."
"야, 요즘은 공부 안 해도 할 거 많아."
그냥 장난으로 넘기려 했지만 리버레이터는 자신을 위로할 방법을 생각해내고 있는지 어째 조용했다. 피피티는 계속 제자리걸음이었다. 그는 조용히 입을 떼었다.
"...좋은 거에요."
"응?"
"모든 게 다 일찍 정해진 사람은 그거대로 불행할걸요."
"......"
"많은 걸 경험해볼 기회가 남아 있는 거라고 생각해요, 저는."
분명 부러워하는 사람도 있을걸요. 말이 끝나고 리버레이터는 다시 노트북을 흘끔 쳐다봤다. 어느새 밤은 늦어져 노트북의 디지털 시계는 열 시 반을 가리키고 있었다. 밖에는 가벼운 눈발이 휘날렸다. 걸어가기엔 충분했다. 그러나 서로를 붙잡아두고 싶은 마음은 각자 마찬가지였다. 리버레이터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자고 갈래요?"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대답이 돌아온다.
"...그럴까?"
리버레이터가 옷장에서 이불을 꺼내 왔다. 이불을 펼치다 셀레스티아가 아직도 불편한 교복 차림이라는 것을 자각하고 다시 방으로 들어가 잠옷을 하나 더 꺼내 왔다. 드라마에나 나올 법한 도련님 스타일의 하늘색 잠옷이었다. 작은 방에 들어가 잠옷으로 갈아입으며 살짝 향기를 맡았다. 그저 그런 세탁 세제 냄새가 왜 이때만큼은 특별하게 느껴지는 걸까.
"왔어요?"
"야, 너 무슨..."
신부 웨딩드레스 보는 신랑처럼... 뒷말은 속으로 삼켰다. 여기까지 말하면 분위기가 이상해질 거 같았다. 그러나 리버레이터는 개의치 않고 계속 말한다. 어울려요.
"...그래. 고맙다."
"졸려요?"
"음. 사실 별로 안 졸려."
당연하다. 자고 가라는 것도 그를 잡아두기 위해 이른 시간에 급하게 생각해낸 리버레이터의 묘책이었기 때문이다. 그의 옆에 꼭 붙어 푹신한 이불 위에 앉았다. 리버레이터는 텔레비전을 틀었다. 아무 채널이나 돌린 케이블 티비에서는 타이타닉이 나오고 있었다. 눈은 계속 내리고 내려 소복하게 쌓이고 있었다. 늦은 겨울 밤에 같이 보는 고전 로맨스 영화. 누군가에겐 진부한 소설 속 장면일 수도 있지만 지금의 이 순간은 너무나 특별하게 다가왔다.
"있잖아."
"...네."
"나는 언제 꼭 한번 특별한 연애를 해 보고 싶었거든. 남들이 들으면 정말 놀랄 만한."
"네."
"근데... 다시 생각해 보니까, 연애란 건 본인들에겐 다 특별한 경험이겠지."
"그쵸. 애틋한 사람과의 추억이니까..."
"응......"
리버레이터가 셀레스티아의 어깨에 살며시 기댔다. 아까부터 리버레이터는 무엇을 생각하는지 침잠한 듯한 눈을 하고 있었다. 영화는 클라이막스가 지나고 잭은 로즈가 올라타 있던 널빤지를 놓치며 물 속에 가라앉는다. 리버레이터가 넌지시 말을 건넸다.
"졸업하면 못 보겠네요."
그런 말은 또 왜 하는 건지.
아까부터 기분이 롤러코스터를 타는 듯 올라갔다 곤두박질치다 했다. 그의 말 한마디 한마디에 기분이 확확 바뀌었다. 안 볼 거라는 것처럼 말을 하는 그가 괜시리 미웠다. 셀레스티아는 일부러 힘을 주어 말했다.
"왜. 만나면 되지."
"저 만나줄 거에요?"
"응. 만나 줄게."
그가 아이처럼 웃었다. 세상 무심하게 생겨선 그런 표정도 지을 줄 아는지 오늘 처음 알았다. 올라간 입꼬리는 또 금세 내려앉는다. 티비에선 로즈가 뭐라고 말을 하더니 바다에 보석 목걸이를 던져버렸다. 고개를 푹 숙이고 있는 리버레이터의 짙은 푸른색 머리를 쓰다듬었다. 영화 끝났는데 이만 잘까?
난방을 한 지 오래 되지 않아 살짝 쌀쌀하긴 했다. 리버레이터는 그 핑계를 대고 슬쩍 몸을 붙였다. 추워요. 그날 그 눈 쌓인 길을 걸으면서도 군소리 하나 안 했던 애가 이러고 있으니 웃기다. 셀레스티아는 싫지 않아 그것을 받아주었다. 가슴팍이 가까웠다. 심장이 요동치는 소리가 들리는 것만 같았다.
"......크리스마스에 뭐 해?"
충동적인 질문이었다.
"......"
"...약속 있으면 말고."
"선배."
"응?"
"저 전학 가요."
"뭐?"
셀레스티아는 튕기듯 몸을 일으켰다.
"무슨 소리야."
"죄송해요."
화가 나려다 죄송하단 한 마디에 머리가 차게 식었다. 네가 나에게 미안해야 할 이유가 무엇일까. 화나는 감정을 느끼는 건 왜일까. 언제부턴가 너를 마치 연인이라도 된 것처럼 생각했을까. 기대에 차지 않는 답을 받으면 기분이 상하고, 너의 행동 하나하나에 내 기분이 결정되고. 셀레스티아는 몸을 천천히 내렸다.
"본가에서 다시 올라오라고 해서..."
"그럼 그때 잠깐 올라갔던 것도..."
"네. 아버지가 부르셔서 갔어요."
"...그렇구나."
하고 싶은 말이 너무나 많았다. 이런 감정을 자신에게 떠안겨 놓고 도망치듯 떠나는 그가 너무 미웠다. 책임지지 못할 거면 옆에라도 있어 주지. 자각했을 때는 이미 모든 것이 끝나버린 이후였다. 셀레스티아는 머릿속의 말들을 고르고 골라 그와 자신 모두 수용할 수 있는 답변 하나를 겨우 내놓았다.
"...그럼 크리스마스 때 못 보겠네."
"...네."
"아쉽네..."
리버레이터는 잠시 고민하다 입을 열었다.
"저 아니어도 선배랑 만나려는 사람 많을 거에요."
"......"
"그만큼 좋은 사람이니까... 선배는."
전혀 아닌데... 라고 생각했다.
무슨 정신으로 잠에 들었는지도 모르겠다. 깼을 땐 그는 자신의 곁에 없었다. 시간은 아침 아홉 시 반이었다. 지각이었다. 그러나 그런 걸 신경 쓸 여유가 아니었다. 책상에 올려진 닫힌 노트북 위에 보라색 포스트잇이 붙어 있었다.
완성되면 선배 이름이랑 같이 제출할게요
작은 방에 들어가서 옷을 다시 갈아입었다. 그때 자신이 벗어둔 옷은 건드려지지 않고 그대로 있었다. 다시 나와 노트북 위의 포스트잇을 떼서 네 번 정도 접었다. 새끼 손톱만해진 포스트잇은 패딩 주머니 안으로 들어갔다.
신발장에는 그때 빌려간 슬리퍼가 놓아져 있었다.
셀레스티아는 확 그 슬리퍼라도 들고 가버릴까 하는 생각을 했다. 그렇게라도 여기 있어 주면 안 될까. 신데렐라처럼. 언젠가 내가 이 슬리퍼 들고 네 앞에 나타날게.
담임 선생님껜 오늘 못 갈 것 같다고 전화를 했다. 무단 결석 따위야 두렵지 않았다. 소파에 힘없이 늘어져 있는데 클라모르 형이 다가왔다. 고딩아, 학교 안 가냐. 셀레스티아는 다 죽은 눈으로 대답했다.
"나 오늘 이별했어."
"엥?!"
언제? 누구랑? 너 나 몰래 사귀는 애 있었냐. 질문 세례가 쏟아졌다. 도무지 대답할 기운이 나지 않았다. 가만히 있으니 클라모르는 눈치를 보다 슬쩍 방에 들어갔다. 문이 빼꼼 열리고 클라모르가 다시 말했다. 나중에 다 얘기해야돼. 셀레스티아가 대답했다. 으응...
...기단의 영향으로 다음 주부터 혹한기에 돌입할 것으로 보입니다. 올해에는 작년보다 더 빨리 혹한기에 돌입하는 경향을 보였는데요, 그 이유가 무엇인지 취재해 보았습니다. 주 기자...
셀레스티아는 무미건조한 눈으로 티비를 보다 채널을 돌렸다.
갑작스레 눈이 쏟아져 전교생이 일찍 하교를 했다. 셀레스티아는 집에 가면서도 혹시 그와 마주치진 않을까 눈을 크게 뜨고 주위를 둘러보았지만 허탕이었다. 정말로 가버린 걸까. 셀레스티아는 골목길 대신 다시 큰길로 지나다니기 시작했다. 반지하와 마주치면 그때의 기억이 생각날까 봐 두려웠다. 계속 담아두기엔 아픈 기억이었다. 그렇게 서서히 자신의 머릿속에서 지워져갔으면 했다.
학교는 일주일 동안 단축 수업을 하고 방학식을 조금 앞당기기로 했다. 셀레스티아는 동아리 담당 선생님께 리버레이터의 행방에 대해 물어보고 싶어 입이 근질거렸지만 간신히 참았다. 방학식 날 사물함의 책들을 정리하고 계단을 내려가던 중, 무늬만 토론 대회지 실상은 피피티와 워드 제출하기였던 그 대회의 우승작으로, 제출물 일부가 공개되어 있고 그와 자신의 이름이 나란히 적혀 있는 그 포스터를 보고 셀레스티아는 정말로 까무러칠 뻔 했다.
"눈 엄청 온다."
"그니까."
뉴스에서 그렇게 말하던 혹한기가 시작되었다. 눈은 쉴틈없이 부지런하게 내렸다. 눈도 저렇게 부지런한데 난 뭐냐. 눈을 핑계로 밖엘 나가지 않았다. 이때쯤이면 너는 이사를 갔을까. 유리창 밖을 내다보면 네가 살던 빌라가 한눈에 보였다. 그래서 밖을 보기가 더 무서웠다. 하루가 멀다 하고 날리는 눈 때문에 새벽에 일어나면 온 세상이 새하얗게 덮힌 화이트 크리스마스라는 것은 이제 감흥도 없어진 때였다.
"근데 너 헤어졌다는 거."
"아."
"언제 말해줄 거야, 임마."
"그거. 아! 아파! 말해줄게."
클라모르가 셀레스티아의 볼을 장난스럽게 꼬집었다.
"근데 그거 그냥... 별 건 아니고."
"응."
"짝사랑하던 애였는데 전학 갔어."
"엥? 삼 학년인데?"
"...연하야."
"오......"
"무슨 오야..."
셀레스티아가 멋쩍게 웃었다.
"근데 사실 그렇게 좋아했던 것도 아니라서... 별 거 아냐. 이젠 생각도 안 들어."
"뭐야. 그땐 그렇게 힘없이 축 쳐져 있더만."
"하하..."
정말 별 거 아니었으면 좋겠다.
시간은 하염없이 흐른다. 네가 잠시나마 내 곁에 있었다는 사실도 희미해질 정도로. 아니면 정말 한 겨울 밤의 꿈이 아니었을까. 내 착각 아닐까. 처음부터 내 곁에는 클라모르 형과 A와 B밖에 없었는데, 나의 환상이 만들어낸 착각 아니었을까. 그 위안은 세탁하려고 꺼낸 패딩의 주머니 안에서 구깃하게 접힌 보라색 포스트잇이 툭 떨어졌을 때 모조리 쓸모없게 되어 버리고 말았다.
기다린 크리스마스엔 눈이 오지 않았다.
오랜만의 따뜻한 날씨에 커플들이 너나 할 것 없이 손을 잡고 나와 거리를 가득 채웠다. 길거리엔 캐롤이 울려퍼지고 트리 장식이 가득했다. 빼빼 마른 나무에는 꼬마전구가 빙빙 감아졌다. 길거리를 내려다보던 셀레스티아는 무심코 빌라에 시선이 갔다. 지금쯤이면 넌 정말로 가고 없겠지. 셀레스티아는 무언의 힘에 이끌려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눈은 현관문의 절반이 넘게 쌓여 있었다. 그냥... 들어가지 말까. 라는 생각도 들었지만 그래도 옆에 놓인 제설도구함에서 삽을 꺼내 들어 눈을 치웠다. 한겨울인데 땀이 나네. 하하...
문을 열고 들어간 집안은 언제 사람이 살았냐는 것처럼 허전했다. 그나마 그가 있었다는 사실을 증명하기라도 하듯 고쳐진 창문은 그대로였다. 소파는 그냥 두고 갔는지 여전히 있었다. 셀레스티아는 가만히 소파에 앉아 보았다. 그때 그 기억이 떠오른다. 망설임도 없이 제 발을 잡았던 그 손길이. 금세 얼굴이 화끈해졌다. 남사스러운 놈.
어쩌면 너도 날 좋아했을까.
그렇지 않고서야 그런 짓을 서슴없이 했을 리가. 나보고 같이 자자고 했을 리가. 같이 붙어 앉아 티비를 보던 일이, 띄엄띄엄 떨어져 있는 <타이타닉> 의 조각 같은 장면들이 머릿속에 오래된 필름 영화처럼 재생된다. 마치 연인 같던 우리의 모습이 생각난다. 그러나, 정말로 좋아했다면...
"버리고 가지도 않았겠지."
혼잣말은 텅 빈 집안에 울려퍼진다.
우편함엔 정리되지 않은 우편물들이 쌓여 있었다. 몇 개는 그의 이름으로 왔고, 몇 개는 그의 아버지 이름으로 추정되는 이름 앞으로 왔다. 정리도 해 줄 겸 뭉텅이로 집어 꺼냈는데, 그 중에 결이 다른 종이 하나가 있었다. 딱 두 번 접힌 손바닥만한 종이였다. 그것을 보는 순간 가슴이 쿵 내려앉는 느낌이 들었다.
셀레스티아는 종이를 들고 골목길 안쪽으로 향했다. 아무도 궁금해하지 않겠지만 행여나 누구에게 들킬세라 조심스러웠다. 셀레스티아는 종이를 조심스럽게 펼쳤다. 굵은 검정 볼펜으로 눌러 쓴 글씨가 보였다.
선배에게
사실 선배가 볼 수 있을 거라곤 생각 안해요. 보통 이런 곳을 살펴보진 않으니까요.
"뭔가 도둑이라도 된 기분이네..."
그래서 저도 솔직하게 쓰려고요. 여기로 내려온 건 정말 홧김의 일이었어요. 조금 무거운 얘기겠지만 상을 당했거든요. 친형이요.
그 줄을 읽고 셀레스티아의 손이 순간 떨렸다. 그 바람에 종이를 거의 떨어트릴 뻔 했다.
정말 힘들었어요. 아버지 일도 제가 다 물려받아야 하고, 계획되어 있던 걸 처음부터 다시 바꿔 끼우고... 무엇보다도 형은 정말 저에게 너무 소중한 사람이었어서, 그게 힘들더라고요. 견디는 게. 형이 죽은 그 집에 한시라도 더 있고 싶지가 않았어요. 그래서 떠났어요. 충동적으로. 거기서 선배를 만났어요. 사실 저도 정말 제가 떠나 살게 될 줄이라곤 상상도 못했거든요. 주변에 아무도 없는데 선배가 다가와 주셨어요. 제가 선배한텐 많은 주변 사람 중 하나일지 몰라도 선배는 저한테 유일한 사람이었어요. 선배 때문에 여기에 계속 있고 싶었어요. 하지만 도망쳐 온 주제에 언제까지나 여기에 계속 있을 수만은 없어서...
뭘 쓸지 고민한 듯한 흔적과 함께 단락이 끊어져 있었다.
그날 밤은 평생 못 잊을 거 같아요. 그리고 만나 주신다는 말 안 잊었어요. 언젠가 제가 선배에게 부끄럽지 않은 사람이 되면 그때 선배 앞에 나타날게요. 선배, 사랑해요.
셀레스티아는 접힌 선대로 다시 편지를 가만히 접어 자켓 주머니 속에 넣었다.
나머지 우편물들은 대충 구겨 길거리 쓰레기통 안에 넣었다. 눈은 다음날에도 내리지 않았다. 그 다다음날에도, 다음 주에도, 다음 달에도. 셀레스티아는 다시 편지를 꺼내 보는 일이 없었다. 뉴스에서는 빙하기의 끝을 알리는 축하 멘트와 함께 웃으며 각자 한 마디를 건네는 패널들의 모습이 송출되었다. 겨울이 끝나고 봄이 찾아왔다. 그러나 셀레스티아의 마음 한 켠에는 아직도 눈이 내리고 있었다. 네가 찾아와 주면 이 눈도 그치겠지. 그럼 나는 너와 마주보고 웃으며 각자 한 마디를 건네겠지. 길거리의 눈이 다 녹았을 때쯤에야 셀레스티아는 빈 우편함에 접은 포스트잇을 하나 넣었다. 그 종이에는 이렇게 써져 있었다. 기다릴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