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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버셀레] 어느 날 네가 사라졌다. 

 

 

 어느 날 네가 사라졌다. 

 

 어떠한 흔적 조차 남기지 않고 너는 그렇게 홀연히 사라졌다. 

 

 아무런 예고도 없이, 갑자기. 

 

 

 

 화려한 별은 종말도 화려하다고 하지 않던가. 자신을 불태우며 온 힘을 다해 환한 빛을 내던 별은 자신의 몸 안에서 태울 것을 모조리 다 태우고 나면 화려했던 생만큼 요란하게 폭발하며 심지어는 죽은 자리에 블랙홀을 남겨 놓기도 한다고. 그렇기에 너도 그러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야 너는 화려한 종말을 가진 별을 관측하는 성좌의 관측자가 아니었던가. 네가 오랜 기간 머무르던 곳을 떠나게 된다면 네게 작별 인사를 건네기 위해 배웅 나오는 사람이 여럿일 거라고. 혹여나 의도치 않게 죽음을 맞이하여 장례를 치르게 된다면 너의 마지막을 슬퍼하며 사후에도 네가 행복하길 바라는 조문객만 식장을 가득 채울 것이라고. 그러나 너의 종말은 지나치게 조용하고, 또한 초라했다. 너의 행방을 아는 이는 아무도 없었으며, 너를 찾는 이 또한 없었다. 

 

 이것은 네가 사라진 날로 부터 하루가 지나고 한 달이 지나고 어느덧 2년이라는 시간이 흘렀을 때의 이야기이다. 이별의 고통도 시간이 지나면 무뎌진다고 했던가. 처음에는 아무런 언질도 없이 떠나버린 너를 원망하기도 했었지만 지금은 그저 어렴풋한 그리움 뿐이다. 서운한 마음이 전혀 없진 않았지만 제게 마지막 모습도 비추지 않고 사라진 너에게 어쩌면 말 못 할 사정이 있었겠거니, 하고 생각할 뿐이다. 아니면 아무도 모르는 곳에서 조용히 죽음을 맞이하였을 수도 있고. 애초에 같은 시간선 내에서 동일 인물이 존재한다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기에 어쩌면 너는 너의 시간대로 돌아갔을 수도 있다. 그래도 여전히 네가 그리운 것은 너를 만나고 인연을 쌓음으로써 생긴 당연한 결과이지 않을까. 하르케 형이나 클라모르 만큼 너와 가깝게 지내지는 않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네가 그리운 것은 같은 노아 이벨른이라는 사실에서 기인하는 동질감, 그로 인하여 나타나는 너의 다정함 같은 것들 때문이겠지.  

 

"슬슬 돌아갈까, 클라모르." 

 

 겨울, 더군다나 해가 가장 짧은 날인 동지가 가까워져 가는 이 시기는 낮이 무척 짧았기에 조금이라도 주저하거나 시간을 지체시키는 것을 용납하지 않았다. 어느덧 해가 산을 넘어가며 황혼이 깃든 하늘은 금방이라도 어둠을 한 아름 품에 안을 기세였다. 햇빛에 의해 가려졌던 달은 하늘이 황혼에 물듦에 따라 서서히 제빛을 내고 있었고. 완전히 어두워지기 전에 돌아가야겠지. 어둠이 하늘을 지배한 시간은 상념보다는 우울에 젖게 되기 마련이니까. 

 

 

 

 이 시기 즈음이 되면 겨울비가 내렸다. 눈이 아닌 비가 내린다는 것은 아직 날이 완전히 차지 않다는 것을 의미했으나 눈에 띄게 서늘해지는 공기는 몸에 한기를 돌게 하기에 충분했다. 뜨거운 여름 햇빛과 따사로운 가을 햇살에 익숙해진 몸이 차가운 겨울바람에 적응하기 위해서는 몇 밤을 더 보내야 하는 걸까. 왠지 빗방울이 떨어지는 것 같은 느낌에 고개를 들면 제빛을 내던 달은 어느 새 구름에 가려져 있었다. 마치 커튼처럼 온 하늘에 드리워진 구름. 곧 한 방울 씩 비가 내리기 시작하면 옷가지가 천천히 젖어갔다. 체온은 빠르게 내려갔고, 매섭게 불기 시작한 얼음장 같은 바람에 머리가 지끈거렸다. 비 소식이 있었던가? 감기에 걸리기라도 하면 곤란한데. 리버레이터는 비가 완전히 쏟아지기 전에 돌아가기 위해 발걸음을 빠르게 재촉했다. 이상한 날씨네. 리버레이터의 짧은 감상이었다. 

 

 하늘에 구멍이라도 뚫린 듯 금방 우수수 떨어지는 비에 온 몸이 젖어 드는 것은 그저 시간문제였다. 그렇다. 정말 말 그대로 쫄딱 젖었다. 여차저차 거센 빗줄기를 뚫고 어떻게든 숙소에 돌아온 리버레이터는 마치 강아지라도 된 것 마냥 물기를 탈탈 털어댔다. 그래봤자 머리부터 발 끝까지 푹 젖은 탓에 몸 군데군데에서 물이 뚝뚝 흐르는 것은 막을 수 없었지만 말이다. 결국 포기하고 물을 뚝뚝 흘리며 욕실까지 터벅터벅 걸어가면 지나간 자리에 물 자국이 자욱하게 남았다. 차갑게 식은 몸을 따뜻한 물로 적시고, 물을 잔뜩 먹은 옷을 빨고 바닥에 떨어진 빗물을 닦아내고 나면 그제야 휴식 시간이 겨우 찾아왔다. 추워. 한기가 든 몸은 최대한 몸을 웅크려도 온기가 돌지 않아 달달 떨렸다. 날씨가 이렇게 찬데, 이런 날씨에 달달한 코코아 한 잔 정도는 괜찮겠지. 찬장 구석에 놔둔 코코아 가루를 꺼내는 것을 클라모르가 보기라도 하면 분명히 놀림 받겠지만……. 

 

"노아, 이제 어린 아이라고 불릴 나이는 졸업했으니 코코아는 입에도 안 대겠다고 하지 않았어?" 

 

"……조용히 해, 클라모르. 추워서 그런 거야. 단지 추워서." 

 

 아니나 다를까. 왠지 으스대는 표정을 짓고 있는 것 같은 시클을 바라보며 리버레이터는 눈을 가늘게 떴다. 얼굴도 없는 무기에 표정 같은 게 있을 리가 없지만 이럴 때마다 은은하게 표정이 보인단 말이지. 기분 묘해지게. 리버레이터는 머그잔을 양손에 소중하게 쥔 채 몸을 웅크려 다시 자리에 앉았다. 그러나 코코아 가루를 잔뜩 넣고서 펄펄 끓는 물을 무식하게 들이부은 머그잔을 품에 안아도 추위는 쉽사리 가시지 않았다. 왜 이렇게 춥지? 몸을 조금 더 따뜻하게 할 방법이 없으려나. 리버레이터는 몸을 일으켜서 옷장을 뒤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발견한 것은 다름 아닌. 

 

"……아." 

 

 2년 전, 셀레스티아에게 선물 받은 스웨터. 가만히 입을 다물고 있으면 반은 갈 것을, 덩치도 작은데 얇게 입고 다니면 불쌍해 보인다느니 뭐라느니. 짜증 나게 입을 놀리며 지껄여댔던 것이 아니꼬웠던 기억이 있다. 네가 사라진 그 날 이후 정성스레 개어 옷장 한 구석에 놔둔 스웨터. 왜 이제 와서 눈에 띄었는 지는 잘 모르겠지만. 적어도 따뜻하겠지. 

 

"클라모르. 사이즈 어때? 괜찮아?" 

 

"오~ 잘 어울리는데?" 

 

 품이 널널했던 스웨터는 지금에서야 사이즈가 딱 맞았다. 마치 이 날을 기다렸던 것 처럼. 하기야, 2년이라는 시간이 지나지 않았던가. 틈만 나면 작다고 놀림받던 때와는 달리 훌쩍 커버린 지금은 그와 견줄 정도로, 아니. 어쩌면 그보다도 체격이 더 좋아졌을 지도 모르겠다. 그렇지만 내가 나이를 먹었듯, 그도 분명히 나이를 먹었겠지. 키가 더 컸으려나.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지던 생각은 이윽고 멈췄다. 그래. 네가 사라진 시기가 이 쯤이었지. 자연스레 네 생각을 뇌리에 담게 되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태양이 산을 넘어가고 어둠이 하늘을 완전히 지배한 시간. 너에 대한 생각을 뇌리에 담게 되는 이유로는 그것으로 충분했다. 리버레이터는 잠시 방 안을 훑어보더니 이내 쭈그려 앉아 가구 아래를 더듬거렸다. 익숙한 동작이었다. 손에 닿는 얄팍한 종이 박스 하나를 집어 꺼내어 예의 상으로 가볍게 먼지를 툭툭 털었다. 그리고 뚜껑을 열면 나오는 것은 가지런히 개어져 보관된 남색의 목도리. 리버레이터는 조심스레 양손으로 목도리를 들어 얼굴을 묻고 숨을 들이켰다. 

 

"……아무 냄새도 안 나." 

 

 네가 남기고 간 것은 너무나도 적었다. 그렇기에 너를 추억할 수 있는 수단도 손에 꼽을 정도였다. 너의 흔적이 가장 진하게 남아 있던 것은 이제 무취의 성질을 띄었다. 유일하게 남아 있던 너의 체취가 사라져버린 지금, 너를 추억할 수 있는 수단이 한 가지 사라졌음을 알 수 있었다. 보고 싶어. 네가 사라져버린 목도리를 품에 꼬옥 안으면 그 날의 기억이 떠올랐다. 

 

 

 

"춥지 않아?" 

 

 시원하게 드러난 제 목을 보며 네가 건넨 말 한 마디였다. 이상하게도 너의 호의는 왠지 부담스러웠기에 괜찮다는 말로 대충 상황을 모면하려 했지만, 네가 보기에는 제 모습이 퍽이라도 안쓰러웠나보다. 결국 손사래질을 치는 저를 붙잡아 앞에 세워두고는 자신의 목에 두르고 있던 목도리를 풀어 제 목에 둘러주던 다정한 네 모습. 그때 너는 무슨 표정을 짓고 있었더라. 괜히 긴장한 탓에 어깨에 힘이 잔뜩 들어갔던 것은 생각이 났다. 

 

"필요 없다고 했잖아." 

 

"내가 해 주고 싶어서 그래. 싫어?" 

 

"싫, 은건……. 아니지만." 

 

 어떻게 당사자 앞에서 부담스럽고 불편하다는 말을 입에 담을 수 있으랴. 몸을 휙 돌려 그 자리를 떠나려던 찰나에 네가 제 고개를 붙잡고서는, 아. 

 

"……." 

 

 그거, 첫, 키스였는데……. 알고 있었던 사실을 새삼스럽게 자각하고 나니 귓가가 뜨거워졌다. 엄청 붉어져 있겠지. 이런 건, 이런 건 클라모르한테 절대로 들키면 안 돼. 그런데 감촉이 어땠더라. 뇌리에 깊이 박힐 정도로 생생한 감각이었는데. 아무리 입술을 매만져봐도 어떤 느낌이었는지 전혀 떠오르지 않았다. 그다음은 네가 무슨 말을 했더라. 그리고. 그리고……. 어라? 생각이 안 나. 

 

 

 

 유일하게 남은 너의 체취는 점점 옅어졌고 너에 대한 기억은 점차 흐릿해졌다. 너의 흔적을 되새기며 너를 추억하는 것 조차도 이제는 허용되지 않는 것만 같았다. 사람이 진정으로 죽음을 맞이할 때는 기억에서 잊혀질 때라고 했다. 그리고 너는 내 기억에서 점점 잊혀져가고 있었다. 내가 너를 잊을 정도로 널 소중한 사람으로 여기지 않았던 걸까. 아니면 너에 대한 것들이 내게는 괴로웠던 기억이었기에 무의식적으로 빨리 잊으려고 했던 걸까. 너의 죽음이 다가오고 있다는 생각이 덜컥 들었다. 심장이 내려앉는 것만 같았다. 이런 건 나 답지 않다고 생각했다. 아니지. 소중한 가족을 이미 한 번 잃어놓고 또다시 소중한 사람을 잃는 것은 무엇보다 나다운 것일 지도 모르겠다. 제 머릿속을 채우는 것들이 자학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생각의 굴레를 끊어내는 것은 힘든 일이었다. 셀레스티아. 너는 지금 어디에서 뭘 하고 있지? 작별 인사 한마디 없이 떠나버린 네가 원망스러웠다. 소식은 커녕 생사의 여부도 전해지지 않아 너의 근황을 알 수 없는 것이 답답했다. 

 

"……바보 같아." 

 

 리버레이터는 입고 있던 스웨터를 냉큼 벗어버렸다. 금방 몸에 차가운 바람이 닿으며 서늘한 한기가 돌았지만 개의치 않았다. 리버레이터는 벗어버린 스웨터와 더 이상 의미가 없어진 목도리를 빨래 바구니에 아무렇게나 쑤셔 넣고는 자리에 누워 억지로 잠을 청하려 했다. 만날 수 없는 사람을 떠올리며 우울에 잠식되는 제 모습이 볼품 없다고 느껴졌다. 울 것 같아. 그냥 기분이 그랬다. 네가 떠난 날도 이 시기 즈음이었는데. 최근에 잠들지 못하는 밤이 점점 늘어갔던 건 그런 이유에서였을까. 그 무엇에도 의욕이 나지 않을 정도로 지친 몸은 유독 쉽사리 잠에 들지 못했다. 리버레이터가 겨우 잠에 든 것은 잠자리에 든지 몇 시간이나 지났을 때였다. 

 

 

 

"하아……." 

 

 현실과 비현실의 사이. 그래, 이것은 꿈이었다. 한기는 전혀 느껴지지 않았지만 꿈속의 배경도 마찬가지로 겨울임을 리버레이터는 아주 쉽게 알 수 있었다. 꿈이라는 것은 보통 그렇지 않던가. 마치 처음부터 그래왔던 것처럼 사실이 아닌 것들이 머릿속에 각인되고, 비현실적인 일이 일어나더라도 지독한 몽롱함 속에서 이것이 현실이라는 착각을 불러일으키는 것. 내쉰 한숨 사이로 새하얀 입김이 공중에서 너울거리다가 사라졌다. 사라진 입김 너머로 익숙하지 않은 풍경이 익숙한 모습으로 펼쳐졌다. 금방이라도 눈이 내릴 듯한 잿빛 하늘. 그 아래로 잿빛 자갈이 깔린 길. 봉오리를 꾹 다물고서 봄을 기다리는 꽃. 아직 채 피어나지 못한 꽃들의 줄기는 검었다. 리버레이터는 손을 들어 제 손을 유심히 살폈다. 창백하게 느껴질 정도로 하얀 색이었다. 온 세상이 무채색이었다. 리버레이터는 약속이라도 한 양 천천히 앞으로 나아갔다. 자갈이 밟히며 자그락자그락하는 소리가 온 공간에 울려 퍼졌다. 아. 시선 바깥으로 옅은 색채가 스쳐 지나간다. 고개를 돌리면 아직 꽃잎이 오므려진 꽃이 있었다. 마치 달빛처럼 샛노란 빛으로 빛나는……. 

 

"달맞이꽃?" 

 

 달맞이꽃이 겨울에도 피는 꽃이었던가? 그런 사소하고 당연한 고민 조차도 꿈속에서는 허락되지 않았다. 애초부터 겨울에도 피는 꽃이었던 양 달맞이꽃이 온 땅을 가득 메운 그 풍경은 매우 당연했다. 일순간 기억의 파편이 머릿속으로 흘러 들어왔다. 기억 속의 풍경도 이와 같았다. 태양이 산을 넘어가며 찾아온 밤. 꽃잎을 활짝 피워낸 달맞이꽃이 온 땅을 뒤덮고 있었고, 무더위 속에 한 줄기 바람이 부는 여름의 하늘에는 별들이 자욱했다. 쏟아져 내릴 것만 같은 별들을 너와 함께 헤아리던 그 날. 너는 내 손을 겹쳐쥐고서 별들의 이름을 하나하나 알려 주었다. 밤하늘의 길잡이 역할을 하는 북극성. 죽음을 주관하는 별 북두칠성. 스스로의 자만심과 허영심으로 파멸에 이른 카시오페이아. 견우와 직녀, 데네브, 알타이르, 베가. 하늘을 가로질러 흐르는 은하수를 따라 밝은 별들 사이로 날아오르는 백조자리. 붉은 색의 심장을 가진 전갈자리. 비록 무수히 많은 별들 사이에서 네가 헤아려 주는 별들을 다 찾을 수는 없었지만, 너와 함께하는 시간은 제법 좋았던 것 같다. 밤하늘이 그대로 비쳐 반짝반짝 빛나는 너의 눈동자. 저를 향한 다정함이 섞인 감미로운 목소리. 겹쳐진 손 사이로 전해져 오는 너의 온기. 칠흑같이 어두운 밤이었음에도 저를 둘러싼 모든 것은 빛났고 색채가 가득 담겨 있었다. 마치 오로라처럼. 그러나 네가 없는 이 세상은 어떤가. 네가 없는 세상은 무채색이었다. 너와 함께했던 자리, 그곳에 핀 달맞이꽃 조차도 색을 점차 잃어가는……. 

 

"셀레스티아……." 

 

 그래. 그 풍경들은, 너와 함께였기에 더욱 아름답게 느껴졌던 풍경이었다. 한 번 더 보고 싶어. 금방이라도 별이 쏟아져 내릴 듯한 밤하늘. 그 광경이 내비치는 너의 눈동자. 잠에서 깨고 나서도 그 풍경만은 눈에 선연했다. 아직 해가 뜨지 않은 시간이었다. 왠지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지금 나가면 너를 만날 수 있을 것 같아. 그리움에 사무쳐 홀려버린 것일지도 모르지만. 그렇지만. 어쩌면. 

 

 

 

 리버레이터는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헐렁한 잠옷 차림에 새하얀 맨발이었다. 클라모르는 자고 있으려나. 리버레이터는 겉옷만을 걸친 채 살금살금 숙소를 나섰다. 뺨을 스치고 옷 사이로 스며드는 새벽 공기는 뼈까지 시릴 정도로 차가웠다. 따뜻하게 입고 나올걸 그랬나. 역시 조금은 후회감이 들었지만 그다지 개의치 않았다. 어차피 너를 만날 일은 없을 테고, 저는 그리움을 핑계로 새벽 공기나 쐬러 나온 것이었으니까. 그랬어야만 했다. 

 

"……어?" 

 

 서리가 내려 새하얗게 물든 땅을 거닐며 제 발자국을 새겨놓을 즈음, 저 멀리서 인영이 희미하게 보였다. 그림자가 형상을 만들어 내더니 이내 작고 익숙한 짐승의 형태를 취한 채 제 주위를 둘러쌌다. 그림자는 생각보다 눈치가 빠른 편이지. 그렇지만 믿을 수 없었다. 어째서? 지금의 이 상황은 제가 생각하고 있는 것이 맞는 걸까. 인영은 익숙한 걸음걸이로 걸어오고 있었다. 잊을 수가 없었다. 아니, 설령 잊었다고 해도 특유의 자신감 넘치는 걸음걸이는 누군가를 연상하게 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야 그렇잖아. 어떻게 너를 떠올리지 않을 수가 있겠어. 셀레스티아. 주변을 맴돌던 서릿발은 어느새 자취를 감추었다. 리버레이터는 발걸음을 재촉했다. 재회의 순간 앞에서 가만히 있을 수 있는 사람이 어디에 있으랴. 찬바람 사이로 뺨에 무엇인가가 스쳐 지나갔다. 밝게 빛나는 가로등 아래, 너울거리는 그것은 눈이었다. 첫눈은 이미 내렸으니 두 번째 눈 정도인가. 그리고 넌. 

 

"너 미쳤어?" 

 

 만약 널 다시 만나게 된다면 그 어느 때보다도 다정하게 인사해 주리라, 그렇게 다짐했었건만. 다짐은 새하얗게 깎여져 내려갔다. 

 

"이 날씨에 왜 반바지를 입고 있어?" 

 

 그 뿐만이 아니었다. 조금 앳된 외모와 자신보다 좀 더 작은 키. 저와 닮은 익숙한 외형을 보아 노아 이벨른임은 확실했지만 이가 셀레스티아임은 쉽사리 확신할 수 없었다. 그가 이렇게 작고 어린 모습을 하고 있었던가? 아무리 너에 대한 기억이 점차 흐려지고 있다지만 그 질문에는 쉽게 아니오라고 답할 수 있었다. 리버레이터는 제 겉옷을 벗어주려다 말고 멈추었다. 그제서야 '노아 이벨른'은 입을 열었다. 

 

"오랜만이야, 리버레이터." 

 

 입꼬리를 올려 웃음 지어 보이는 그 모습. 얼마나 그리워했던가. 다리에 힘이 풀려 그 자리에 주저앉아버릴 것만 같았다. 리버레이터는 제 겉옷을 벗어 그 작은 몸에 걸쳐 주었다. 지퍼까지 단단히 여며준 다음 그 얼굴을 다시 마주했다. 어떻게 된 일이지? 

 

"셀레스티아." 

 

"묻고 싶은 게 많은 얼굴이네?" 

 

"대체 어떻게 된 일이야? 너, 너……. 아무 말도 없이 사라졌을 때는 언제고. 어떻게……. 추우니까 일단 들어가서 얘기해." 

 

 헐렁한 잠옷 사이로 찬 바람이 금방 스며들었다. 맨살과 맨발에 닿는 찬 공기에 소름이 끼칠 지경이었다. 리버레이터는 셀레스티아의 손을 잡고 자신의 숙소로 이끌었다. 새하얗게 눈이 휘날리는 풍경. 손을 맞잡은 너와 나. 이 모든 것이 꿈만 같았다. 지금 나를 따르고 있는 이가 정말로 셀레스티아가 맞는 걸까. 내가 귀신에 홀려버리기라도 한 건 아닐까. 설마 교단이……. 뒤를 돌아보면 너는 그저 추위에 발갛게 물든 얼굴로 맑은 미소를 지어 보일 뿐이었다. 그래, 설마 그렇겠어. 네 미소는 저를 향하고 있고, 너의 따뜻한 체온이 맞잡은 손을 통해 제게로 전해지는데. 그렇지만 혹시 모르니 클라모르에게 한 번 귀띔은 해 봐야겠다. 너를 만났다는 기쁨에 판단력이 흐려진 것일 수도 있으니까. 찬바람이 얇은 옷 사이로 새어 들어왔지만 하나도 춥지 않았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는 사이 둘은 어느새 숙소에 다다라 있었다. 

 

"클라모르, 나 왔어." 

 

"노아, 너 대체 어디 갔다 온 거야? 나한테 말도 없이! 어? 처음 보는 사람이네. 누구랑 같이 온 거야?" 

 

"……셀레스티아. 누구인지 벌써 잊은 건 아니지?" 

 

 흐음, 하는 작은 소리를 마지막으로 클라모르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아마 저와 비슷한 고민을 하고 있는 거겠지. 셀레스티아가 저렇게 작고 어린 모습이었던가? 따위의. 그때 셀레스티아가 나서서 클라모르에게 인사를 건네었다. 

 

"안녕~ 형. 오랜만이야! 잘 지냈어? 리버레이터가 못살게 굴지는 않았고?" 

 

"무슨 소리야? 내가 클라모르한테 못살게 굴 리가 없잖아." 

 

"아하하. 노아! 너도 나한테 형이라고 좀 불러 봐. 응? 이쪽 노아는 얼마나 다정하고 좋아~" 

 

"……한심해." 

 

 자초지종을 듣자면 현재 셀레스티아의 모습은 과거의 모습, 즉 '셀레스티아'라는 이명을 얻기 전의 모습이라고 했다. 스텔라 캐스터라나 뭐라나. 내가 이전의 셀레스티아와 같은 나이가 되었으니, 지금의 셀레스티아는 자신보다 어린 나이인듯 했다. 조금은 귀여울 지도. 셀레스티아, 아니. 스텔라 캐스터? 어쨌든 그는 조만간 클라모르를 다시 인공정령화 시키기 위해 홀로 연구에 들어간다고 했다. 한동안은 못보려나. 아쉽지 않다고 하면 거짓말이겠지만. 어쨌거나 오늘의 태양은 떠올랐고, 이 모든 것이 꿈이 아닌 현실이라는 사실 만으로도 가슴이 벅차올라 뭐든 상관 없었다. 그리고, 아. 클라모르의 정령화까지 모든 일을 다 마치고 나면 그 뒤에도 셀레스티아는 내 곁에 있을까? 

 

"있잖아, 셀레스티아. 이제 어떻게 지낼 예정이야?" 

 

"응?" 

 

 셀레스티아는 조금 고민하는 듯했다. 곧 입을 열면. 

 

"글쎄~ 그건 일단 할 일을 마치고 천천히 생각해 봐야 할 문제 같은데?" 

 

 아, 그래. 알려 주지 않겠다 이거지. 뭐, 그도 그 나름대로 계획이 있을 터다. 제가 나서서 재단하고 선 긋고 방해할 만한 것이 아니라는 뜻이었다. 

 

"그나저나 너, 못 본 사이에 엄청 멋있어진 거 알아? 마지막으로 봤을 때는 완전 꼬맹이였는데~" 

 

"당연하지. 네가 사라진 뒤로 2년이라는 시간이 지났는데. 그동안 뭐 하고 지냈어? 셀레스티아." 

 

"알고 싶어? 비밀이야." 

 

 아, 그래. 저와 같이 나이를 먹었어도 모자랄 통에 훨씬 어려진 네 몸이라던가, 이것저것 묻고 싶은 것이 많았지만 비밀이라는 너의 말에 자연스레 말문이 막혔다. 그래도 오랜만에 만난 건데 근황 정도는 알려줄 수 있지 않으려나, 싶지만 말이다. 본인이 안 알려 주겠다는데 어쩌겠어. 리버레이터는 왠지 이상야릇하고 서운한 기분을 뒤로 했다. 그리고 생각했다. 예나 지금이나 저이의 생각은 파악하기 힘들다고. 분명히 같은 노아 이벨른임에도 이렇게 차이가 날 수 있는 걸까. 리버레이터는 한숨을 내쉬었다. 

 

 

 

 며칠 간은 자유롭게 지냈다. 사실 곧 있을 셀레스티아의 연구를 준비했다는 것에 더 가깝긴 했지만. 머리를 쓰는 일도 체력이 중요하다는 셀레스티아의 말에 따라 얼떨결에 각종 몸에 좋다는 음식들을 먹으러 가기도 했다. 대체 왜 나도 옆자리에서 같이 먹어야 하는 지는 알 수 없었지만 말이다. 연구를 진행하며 간단하게 비축해놓고 먹을 수 있는 식량을 사러 가기도 했다. 나는 짐꾼 역할 정도였으려나. 어느 날은 온종일 도서관에 박혀 원하는 만큼 책을 읽기도 했다. 그와 함께 지내는 시간은 즐거웠지만, 함께 별을 보러 가고 싶기도 했다. 그의 말로는 별을 보러 가는 것은 나중이라고 했다. 정작 그렇게 말한 본인은 매일 밤 별을 관측하러 나가기 바빴지만. 마도구에 갇힌 영혼을 정령화하는 과정은 듣기에 상당히 어려운 작업인 것 같으니 이왕이면 운이 좋은 날이 맞물릴 시기에 연구를 시작하고 싶은 거겠지. 관측을 방해받고 싶지 않은 거고. 이해 한다. 그리고 얼마 되지 않아 그는 마을 외곽에 연구실을 하나 구해 그대로 틀어박혔다. 

 

"만약 내가 보름이 지나도 모습을 보이지 않으면 찾으러 와 줘." 

 

 ……라는 말을 남긴 채. 

 

 그러고 나서는 그다지 재미 없는 일상의 반복이었다. 가끔 마을 사람들의 의뢰를 들어 주고, 헤니르에 잠식된 몬스터들을 퇴치하고. 사실상 평소와 그다지 다르지 않은 일상이었지만 너와 함께 지냈던 며칠과는 대조되는 일상이었기에 지루함이 가득했다. 하기야, 지루하지 않을 리가 없었다. 너의 화려한 입담과 상대방에게 맞춘 배려는 전혀 불쾌하지 않은 방식으로 상대방을 즐겁게 해 주었고, 그것은 저에게도 마찬가지였다. 너와 함께하는 시간이 좋았다. 언제 쯤 너와 다시 함께할 수 있을 지만 곱씹고 있으니 당연히 네가 없는 시간이 지루하게 느껴지겠지. 그렇게 하루가 지나고, 이틀이 지나고, 이윽고 열흘이 지났다. 의구심이 들었다. 

 

"있잖아, 클라모르. 마도구에 갇힌 영혼을 정령화 하는 거, 어려운 거야?" 

 

"응? 적어도 쉬운 일은 아니야. 지금까지 아무도 성공하지 못했던 거니까. 늘 생각하는 거지만 이렇게 보면 다른 노아는 정말 유능한 것 같단 말이지~" 

 

"그건 인정하는 바이지만……. 클라모르, 지금 비교하는 거 아니지?" 

 

"어어. 아니야! 같은 노아라고 해도 둘은 지금까지 살아온 인생이 다르니까. 그리고 난 지금 이대로도 좋은걸? 네가 나더러 '이 쓸모도 없는 마검!' 이라며 갖다 버리지만 않는다면 말이야~" 

 

"내가 그럴 리가 없잖아." 

 

 하여간 이상한 말만 한다니까. 리버레이터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어쨌든, 그러면 걱정할 필요는 없다는 거지? 어려운 작업이니 당연히 오래 걸릴 테고. 클라모르의 말마따나 셀레스티아는 유능하니까. 그렇지만 역시 걱정이 되는 것은 어쩔 수가 없었다. 오늘 밤, 찾아 가보자. 괜찮은지 확인만 하는 거야. 만약 괜찮으면 제가 괜한 걱정을 한 것이고, 안 괜찮으면 제 걱정은 기우가 아니었던 것이 된다. 간단하잖아. 리버레이터는 제 나름의 결론을 내렸다. 빈손으로 가기엔 좀 그러니까 스타후르츠 쿠키 정도는 챙겨가는 쪽이 좋겠지. 

 

 

 

 시간이 지나 해가 산을 넘어갔다. 황혼 마저도 저물며 땅에 어둠이 내리면 리버레이터는 셀레스티아에게 갈 채비를 했다. 여전히 날이 추웠다. 그러나 하늘은 맑은 모양인지 마을 중심부를 벗어나 외곽에 다다라도 길이 전혀 어둡지 않았다. 나무에 가려진 하늘을 올려다보면 앙상한 나뭇가지 사이로 점점 차오르는 달이 보였다. 달빛이 비추어 주는 길을 걸어 나가는 것은 기분이 썩 나쁘지 않았다. 별이 밝게 뜬 듯도 했다. 한참을 걷다 보면 셀레스티아가 알려준 위치에 자리한 작은 연구실에 다다랐다. 상당히 변두리에 위치한 곳이었다. 주변을 둘러보면 별을 관측하기 위한 망원경이라든지, 완전히 그려진 차트 같은 것들이 즐비했다. 꽤나 고생한 모양이야. 굳이 안에 들어가지 않아도 보이는 네 노력과 결과물들을 보며 뒤늦게 약간의 후회가 밀려왔다. 혹시나 제 발걸음이 방해가 되는 것은 아닐까. 노크를 하려던 손은 결국 문을 두드리지 못하고 근처만을 배회하게 만들었다. 리버레이터는 차트가 망가지지 않게 멀찌감치 뚝 떨어져 차트를 천천히 훑어보았다. 셀레스티아와 달리 점성술이나 천문학에 대해서는 영 문외한이었던 리버레이터는 그저 예쁘다, 정도의 짧은 감상만을 남겼다. 그래도 이왕 온 거 안부 정도는 확인하고 가는 게 좋겠지. 리버레이터는 용기를 내어 문을 똑똑 두드렸다. 

 

"……." 

 

 안에 없는 건가? 문에 귀를 대 보아도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똑똑. 

 

"셀레스티아. 나 리버레이터인데……." 

 

 문의 잠금장치가 풀리는 소리가 났다. 끼익, 하는 소리가 나며 문 사이로 틈이 생겼다. 들어오라는 뜻인가? 리버레이터는 조금 긴가민가했지만 조심스레 문을 열었다. 

 

"이크, 꼬마야." 

 

"앗, 깜짝……." 

 

"쉿. 사실 노아가 절대로 열어 주지 말라고 했었거든. 내가 열어 줬다는 건 비밀이다?" 

 

 금빛으로 빛나는 형상이 리버레이터에게 작은 소리로 소곤거렸다. 익숙한 이목구비. 이전에 봤을 때보다 훨씬 더 길게 늘어진 것 같은 머리칼. 정령화에는 성공한 모양이구나. 리버레이터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연구실 안으로 들어서면 바닥에 그려진 마법진과 쌓인 책들 너머로 금방 너를 발견할 수 있었다. 책상 위에 엎드려 곤히 자고 있는 모습이었다. 많이 피곤했던 모양이네. 

 

"셀레스티아. 잘 거면 침대에서 자." 

 

 리버레이터는 바닥에 흘러내려 떨어진 코트를 주워 셀레스티아의 어깨에 걸쳐 주었다. 꾸욱 감겨진 눈이 조금 깊어진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그리고 어쩐지 안색이 좀 붉은 것 같은데. 몸은 뜨겁고……. 

 

"셀레스티아. 일어나 봐. 너 열 나?" 

 

"아, 리버레이터……." 

 

 셀레스티아는 책상에 엎어진 몸을 비척비척 일으켰다. 리버레이터는 감겨진 그의 눈이 깊어진 것 같다고 생각한 게 착각이 아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마치 빠져들 것 처럼 깊이가 생긴 눈동자. 벌어져 훨씬 넓어진 어깨. 그가 성장했음을 알 수 있었다. 

 

"형. 내가 분명히 문 열어 주지 말라고……." 

 

"뭐라고~? 네가 문단속을 제대로 하지 않아서 저 꼬맹이가 멋대로 열고 들어온 거거든? 내가 아플 때는 좀 쉬라고 했잖아, 이 망할 꼬마야." 

 

 내가 멋대로 열고 들어왔다니……. 이런 식으로 각색이 되는 거구나. 리버레이터는 당황한 표정을 애써 감추고 클라모르의 말에 동의한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셀레스티아는 인상을 찌푸린 채 자리에서 일어났다. 영 균형을 잡지 못한 탓에 리버레이터에게 부축 당한 모양새가 되었지만. 

 

"셀레스티아. 몸이 이렇게 될 때까지 무리했던 거야?" 

 

"아니야, 이건. 말하자면 성장통 같은 거야. 윽. 머리야……. 그전에는 이렇게 심하지 않았는데." 

 

"알았으니까 일단 누워서 쉬어. 물수건 올려 줄게." 

 

 리버레이터는 셀레스티아를 침대에 눕혔다. 온몸이 땀범벅이었다. 차가운 물에 얇은 수건을 적셔 이마에 올려 주고 몸을 닦아 주었다. 상당히 지극정성으로 보일지도. 아픈 거, 처음 보는 것 같은데. 묘하게 잠긴 목소리. 눈을 제대로 뜰 기력 조차도 없어 반쯤 풀린 눈. 리버레이터는 묘한 감상을 느꼈다.  

 

"노아, 너~ 내가 간호해 준다고 할 때는 거절해놓고. 무슨 꿍꿍이야?" 

 

"오해야, 형." 

 

"셀레스티아. 너한테 주려고 스타후르츠 쿠키 가져왔는데……. 없던 일로 할게." 

 

 셀레스티아는 못내 아쉬운 표정을 지어 보였다. 어쩌겠어. 리버레이터는 대신 적당히 요기할 만한 것을 찾아 셀레스티아를 위한 죽을 끓이기 시작했다. 그다지 솜씨가 있는 건 아니지만, 이대로 내버려 두고 그냥 간다면 제대로 챙겨 먹지 않을 것 같으니까. 아니나 다를까 별로 먹음직하게 보이지도, 먹음직한 맛이 나지도 않는 그저 밍숭맹숭한 죽이 완성되었다. 셀레스티아가 군말 없이 잘 먹어 줬음에 감사라도 해야겠다고 리버레이터는 조용히 생각했다. 

 

"해야 할 일은 다 끝낸 거야?" 

 

"응. 몸만 나아지면 바로 돌아가려고 했는데……." 

 

"지금 돌아갈까? 아니다. 지금 돌아가자. 너는 혼자 놔두면 되려 몸상태를 악화시킬 것 같으니까." 

 

"선택권도 안 주는 거야?" 

 

"응." 

 

 리버레이터는 셀레스티아의 뚱한 표정을 뒤로 한 채 셀레스티아의 짐을 정리했다. 연구 자료 같은 것들은 나보다는 클라모르가 더 잘 알 테니 클라모르에게 맡기고. 늘 셀레스티아에게 휘둘리기만 했던 것 같은데 아픈 몸 탓에 그저 제 뜻에 따라야만 하는 입장이 된 셀레스티아를 보는 것은 제법 기분이 새롭기도 했다. 어쨌거나 연구소의 정리는 셀레스티아의 의사따위 반영되지 않은 채 진행됐다. 별을 관측하기 위한 천체망원경도, 완성된 차트도, 쌓여 있던 책들도 리버레이터의 숙소로 옮겨졌다. 셀레스티아는 한동안 리버레이터의 숙소에서 지냈다. 밤새도록 열이 올라 온 식구들(이라고 해봤자 리버레이터와 클라모르 둘이다)을 불면으로 만들기도 했고, 몸이 조금 괜찮아졌다 하면 금세 별을 관측하러 나가버려서 애간장을 태우기도 했다. 며칠을 그런 식으로 우여곡절 지내고 나면 셀레스티아의 몸은 언제 그랬냐는 듯 완치되었다. 다행인 일이지. 리버레이터가 이야기를 꺼낸 것은 그로부터 며칠 동안 셀레스티아의 상태를 더 보고 난 뒤였다. 

 

"셀레스티아. 나 별 보러 가고 싶은데." 

 

"응? 응. 오늘 갈까?" 

 

 리버레이터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 날의 기분을 한 번 더 느끼고 싶어서. 별빛으로 잔뜩 물든 네 눈동자를 한 번 더 보고 싶었다. 내심 기대하고 있다는 것을 셀레스티아는 알고 있을까. 그 날의 네 눈동자만은 전혀 잊지 못했다는 걸, 너는 알고 있을까. 아마 모르겠지. 이것은 혼자만의 마음으로 묻어둬야 했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왠지 그래야만 할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겨울은 해가 일찍 졌다. 저녁 식사를 챙기기 전까지만 해도 밝은 하늘이었는데, 저녁을 챙기고 오니 어느새 날이 어둑어둑해져 있었다. 리버레이터는 셀레스티아를 따라 별이 잘 보이는 언덕으로 올라갔다. 앞장 서서 이끌어 주는 것은 제법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오히려 네가 저를 안내해 주는 기분이라 꽤 좋다고 해야 하나. 제법 가파른 돌길을 오르고 흙이 마른 길을 한참 걸으면 어느 새 종착지에 올랐다. 나무 한 그루 없이 탁 트인 하늘은 별이 제법 잘 보였다. 겨울 하늘은 여름 하늘과는 달리 굉장히 맑았다. 조금 춥다는 것만 제하면 높은 하늘에서 반짝반짝 빛나는 별이 가장 보기 좋다고도 할 수 있겠다. 시리우스를 중심으로 하여 그 옆에 자리한 쌍둥이자리, 오리온자리……. 제게 별자리를 읊어 주는 너의 눈동자는 오늘도 여전히 빛났다. 그래. 이 눈동자를 보고 싶었어. 그러나 느낌은 조금 색달랐다. 마냥 크게만 느껴졌던 네가 이렇게 작았던가, 싶어서. 네가 작아졌다기 보다는 제가 커진 것에 가깝지만. 넓게 느껴졌던 어깨는 이제 제 어깨보다도 작아 보여서 품 안에 쏙 들어올 것 같았다. 높은 굽의 신발을 신었음에도 불구하고 이제는 제법 키도 비슷했다. 그렇다면 이젠 너를 조금 더 이해하게 될 수도 있지 않을까. 너를 바라보며 이런저런 생각들을 하고 있으면 네가 제 쪽을 바라보며 야살스러운 눈빛을 지어 보였다. 

 

"리버레이터, 듣고 있어?" 

 

"듣고 있어." 

 

 리버레이터는 최대한 뻔뻔스럽게, 아주 당연하다는 듯이 대답했다. 사실 중간부터 안 듣고 있었어, 라고……. 어떻게 그렇게 말할 수 있으랴. 덕분에 조금은 불신스러운 눈빛을 받기도 했지만. 

 

"있잖아, 리버레이터." 

 

 조심스레 말문을 여는 셀레스티아의 표정은 사뭇 어두웠다. 제게 별을 헤아려 주며 살며시 웃음 짓던 모습과는 전혀 달랐다. 

 

"한 시간대에 동일한 인물이 두 명이나 존재할 수는 없는 거지." 

 

"그게 무슨 말이야?" 

 

"그러니까……. 너와 나, 노아 이벨른이 두 명이나 존재하는 이 시간대는 뭔가 잘못됐다는 거야." 

 

"……그래서? 혹시 네가 갑자기 사라졌던 것과 관련이 있는 거야?" 

 

"응. 아무래도 내가 원래 시간대로 돌아가야 하지 않으려나~ 내가 이 시간대에 맞아 들어가질 않으니 나의 시간이 꼬이게 되어버린 것 같거든." 

 

 리버레이터의 손이 갈피를 잡지 못하고 떨려왔다. 그렇다면 너는 내가 있는 이 시간대를 떠나 원래 시간대로 돌아가겠다는 의미야? 그렇게 된다면 다시는 만나게 되지 못할지도 모른다. 아니, 만나지 못할 것이다. 존재하는 시간대가 달라지니까. 존재하는 세계가 달라지니까.  

 

"……안, 가면 안 돼?" 

 

 이제야 다시 만났다고 생각했는데. 벌써부터 이별을 생각해야 하는 거야? 왠지 울 것 같은 기분이 되어서 고개를 푹 숙인 채 네 옷깃만을 겨우 잡을 뿐이었다. 지금 내 모습, 엄청 추해 보이겠지. 자신의 시간대도 아닌 곳에 불시착해 피해까지 입은 사람에게 가지 말라니. 리버레이터는 고개를 들 수 없었다. 셀레스티아는 놀란 표정을 짓는가 싶더니 곧 살폿 웃음 지으며 제 옷깃을 잡은 리버레이터의 손을 조심스레 맞잡았다. 

 

"리버레이터, 너는 내가 안 갔으면 좋겠어?" 

 

"……." 

 

 리버레이터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아랫입술을 꾸욱 깨물면 숙여진 고개 안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눈동자를 불안하게 굴리다가 이내 입술을 열면. 

 

"셀레스티아. 이건 내 이기심일지도 모르지만……. 아니. 이건 내 이기심이야. 나는 너와 함께하는 시간이 즐거운데. 음. 그러니까……. 네가, 나와 함께 있었으면 좋겠어. 네가 없는 세상은 지루하고, 따분하고. 그리고……. 온 세상이 무채색이라서. 그래, 서……." 

 

"리버레이터." 

 

 셀레스티아는 차분히 리버레이터의 이름을 불렀다. 그리고 맞잡은 손을 들어 올려 양손으로 감싸 쥐면 리버레이터는 그제서야 제가 무의식적으로 손에 힘을 꽉 주고 있었다는 것을 눈치챘다. 셀레스티아의 손이 하얗게 질려 있었다. 아. 바보 같아. 한심해. 금방이라도 눈물이 터져 나올 듯 귀가 먹먹했다. 셀레스티아는 무릎을 꿇고 고개를 들어 리버레이터의 숙여진 얼굴을 마주했다. 그늘져 잘 보이진 않았지만 분명히, 리버레이터는 울고 있었다. 

 

"내가 미안해, 리버레이터. 함부로 떠나겠다는 말을 입에 올려서. 나도 너와 함께 있는 시간이 즐거운데……. 나, 여기에 있을까? 어떻게 생각해?" 

 

 지금 이 순간, 저만을 담고 있는 눈동자가 아름다웠다고. 리버레이터는 그렇게 생각했다. 

 

"……일어나, 셀레스티아. 제대로 얼굴 보고 이야기 할래." 

 

 셀레스티아가 몸을 일으켰다. 이전 같았으면 한 뼘 내지 한 뼘 반 정도의 차이로 눈높이가 맞지 않았을 텐데, 지금은 눈높이가 딱 맞았다. 리버레이터는 이 순간까지도 계속 눈치를 보는 듯했다. 쉽사리 마주치지 못하는 시선. 그렇지만 한 번 쯤은 진심을 전해야 하지 않겠어. 리버레이터는 얕게 심호흡하고는 마치 이 순간만을 고대해왔던 것처럼 시선을 제대로 마주했다. 

 

"너를 좋아해, 셀레스티아. 그래서 너와 함께하고 싶지만, 네가 나 때문에 피해를 보는 것은 원치 않아. 그러니까 네가 원하는 선택을 해. 네가 만약 떠난다고 하더라도……. 원망하지 않을 거야. 대신 가기 전에 작별 인사는 하고 가줘. 부탁이야." 

 

 셀레스티아의 입이 머뭇거리다가 벌어졌다. 이 순간에도 그저 웃음 지을 뿐이었다. 

 

"네가 원한다면 여기에 있을게." 

 

"괜히 나 때문에 그러지 말고……." 

 

"왜 너 때문에 그러는 거라고 생각해? 나도 너 좋아해, 리버레이터." 

 

 ……어? 리버레이터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거, 짓말……." 

 

"거짓말일 리가 없지~ 내가 왜 지금 이 자리에 있다고 생각해? 얼마 전에 열이 올라서 크게 앓았던 거 기억하지? 그런 리스크를 감수하고서 너랑 같이 있는 건데." 

 

"아. 미안해……." 

 

"아니~ 내 말 듣고 있는 거지? 아, 그리고 덕분에 이젠 서로 동등한 위치가 되기도 했잖아? 18세의 리버레이터라. 좀 기분이 묘하긴 하지만~ 멋있어." 

 

 셀레스티아는 장난스럽게 손을 내밀어 손가락 끝으로 리버레이터의 가슴팍을 꾹 눌렀다. 제가 기억하던 것과는 달리 단단해진 가슴팍. 어느 새 훌쩍 커버려 더 이상 너를 내려다보지 않아도 된다는 것은 상당히 묘한 감상을 일으켰다. 어딘가 묘하게 서툴고, 어리숙하고, 왠지 지켜줘야 할 것만 같은 어린 아이였는데. 잠시 시간선에서 벗어나 헤매고 있던 사이 제법 어른이 되었구나. 굳이 시간에 대한 리스크를 감수해가며 이 시간선에 머무를 필요는 없는 것이었다. 사실 돌아가고자 한다면 돌아갈 수 있었다. 날 누구라고 생각하는 거야? 노아 이벨른. 성좌의 관측자라는 과분한 칭호를 얻은 천재 셀레스티아인걸. 그렇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곳에 머물고자 한 것은 오로지 내 앞에 있는 이 귀여운 꼬맹이가 그리워질 것 같아서라고. 

 

"닿지 않을 마음이라고 생각했는데." 

 

 그래. 리버레이터는 늘 옳은 길을 찾아 앞으로 나아가고자 하는 소년이었던 것이었다. 적어도 셀레스티아의 눈에는. 그렇기에 제가 좋아하는 마음이 얼마만큼이든 전해지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지. 

 

"조금 늦었을지도 모르지만……. 내내 널 좋아하고 있었어. 그래서 널 다시 보러 온 거야. 뭐어, 문제가 한두 가지가 아니긴 하지만 어떻게든 되겠지! 방법을 찾아낼 거야. 우리, 나와 형이 그랬던 것처럼." 

 

"정말이지, 셀레스티아." 

 

 문제 따위는 없다는 듯이 맑게 웃어 보이는 그를 가만히 바라보던 리버레이터는 한숨을 짧게 내쉬었다. 그건 그렇고, 떨고 있잖아. 추우면 춥다고 이야기를 할 것이지. 리버레이터는 품에서 목도리를 꺼내어 그 얇은 목에 둘러 주었다. 몇 바퀴를 둘러 제법 따뜻해 보이는 모양새가 되면, 

 

 쪽. 

 

"……약속의 증표로 받아 갈 거야. 너, 이 몸으로는 첫 키스잖아. 그리고……. 목도리, 돌려 줄게. 이젠 필요 없게 됐으니까." 

 

 스스로의 의지. 그리고 선택의 결과. 그것이 어떤 결말을 초래할지는 모르지만 어떤 결말을 맞이하든 우리는 함께일 것이다. 시공간을 초월한 인연이라. 왠지 낭만적이지 않은가. 우리는 어쩌면 우주의 끝에 다다른 것일지도 몰라. 둘은 손을 맞잡았다. 우리는 쌍성으로써 화려하게 빛날 거야. 그 무엇보다도 화려하게 빛나면 그 종말도 화려하게 물들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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